완성형 엄마가 되고 싶었던 강박
“아이와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이가 태어난 후부터 저 질문인지 하소연인지 모를 말을 수도 없이 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불안함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함에서 나온 말이었다. 돌아오는 반응은 대부분 “나도 특별한 거 없어. 그냥 자연스럽게 하면 돼”였다. 그냥이라는 말이 수능 만점자가 교과서만 보고 공부했다는 말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남들은 그냥 한다는데 왜 나는 마음을 먹고 또 먹고 해도 잘 안 되는 걸까.
발달의 결정적 시기라는 생후 36개월까지, 나는 그 시기를 헛되게 보내고 있을까 봐 심히 초조했다. 뭐라도 하며 자극을 주긴 해야겠는데 뭔가 잘 되지가 않았다. 아이와 어떤 식으로 시간을 보내야 할지 관련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어렵게 느껴졌다. SNS에 남들이 올려놓은 활동을 따라 해 보았지만 전혀 비슷한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화면 속 아이들은 단계별로 활동을 완수하고 활짝 웃고 있는데 우리 집은 시작도 전에 엄마의 두통이 시작되었고, 시작과 동시에 난장판이 되어 화만 내다 끝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처음 물감놀이를 시도했을 때도 그랬다. 지인들은 진작 하고 있었던 물감놀이를 나는 엄두가 안 난다는 이유로 미뤄왔다. 하지만 세상에 내 아이 빼고 모든 아기들이 물감놀이를 통해 발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결국 억지로 준비했다. 1분도 채 안 돼 모든 색깔이 다 섞여버렸고 알록달록한 물감 방울이 옷과 벽지와 가구에 안착했다. 잔소리 공습이 이어졌고 아이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속으로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화를 통제할 수 없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물감놀이 난장판의 뒷정리를 마치고 소소를 씻긴 후 드디어 한숨을 돌렸을 때 찾아온 공황발작이었다. 고작 물감놀이 한 번에 호흡 곤란이 오다니, 그게 그 정도로 힘들었나요, 소소어머님? 남들은 잘만 하는데. 황당+당황+한심+무능이 동시에 느껴졌다.
“엄마, 애랑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애랑 노는 거, 별 거 없다. 그냥 무조건 물고 빨면 되는 거야. 그게 다야.”
물고 빨라고? 요즘은 어른 입술의 헤르페스 균이 아이에게 옮긴다고 해서 옛날처럼 애한테 막 뽀뽀하고 그러면 안 된다고 맘카페에서 그러던데. 안 그래도 출산 후 면역력이 떨어진 탓에 내 입술은 줄곧 수포가 함께 하고 있는데 말이다. 내가 뽀뽀를 하는 순간 내 입술의 균이 아이에게로 환승해 갈 것만 같았다. 친정엄마의 말은 옛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라 생각했고 나는 뽀뽀를 시도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해가 될 거라고 말해주니 남편도 뽀뽀를 하지 않았다. 얼굴뿐만 아니라 팔과 다리, 손, 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옷으로 덮여있지 않은 소소의 맨살은 우리 부부에게 2년이 넘도록 출입제한구역이었다.
종종 친정엄마는 우리 집에 오시면 소소의 배에 당신의 얼굴을 비비거나 엉덩이를 깨물어주셨다. 나로서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아기는 그걸 좋아하는 듯 보였다. 아기가 좋아하니 일단 따라 해 보았다. 아기의 배에 내 얼굴을 어색하게 부빈 다음 얼른 고개를 들어 반응을 확인했다. 아이 얼굴에 웃음기가 없다. 이게 아닌가? 살짝 위축됐다.
다음엔 엉덩이 깨물기였다. 혹시나 아플까 봐 조심스러워서 아주 살짝 물었는데 역시 아기가 웃지 않았다. 너무 약해서 재미가 없었나 싶어 2차 시도 땐 좀 더 세게 물었더니 아기가 “으앙” 하고 찡그렸다. 나는 또다시 위축됐다. 이것도 아니구나. 왜 할머니가 하면 웃는데 내가 하면 웃질 않지. 내가 육아에 재능이 없는 걸까. 아니면 나를 싫어하는 걸까. 혹시 너를 부담스러워하는 내 마음을 네게 들켜버린 건 아닐까.
퇴근 후 집에 오면 설거지, 요리와 같은 가사를 전담했다. 종일 육아에 지쳤을 남편에게 “내가 저녁에 퇴근하고 오면 애 볼래, 집안일 할래?”라며 선택의 우선권을 줬는데 다행히 자기는 아무 거나 상관없단다. 아이와 놀아줄 자신이 없는 나는 얼른 집안일을 맡겠다고 냉큼 말했다. 주방에서 흘끗흘끗 보이는 남편과 아이의 노는 모습이 TV 속 풍경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 시기에 나는 스스로가 완성형 엄마이길 원했던 것 같다. 말로는 초보 엄마라 부족하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높고 엄격한 기준을 세워 놓았기에 아기를 향한 나의 행위는 강박적 의무감의 산물이 되었다. 심지어 아기를 향한 미소마저도 ‘이럴 땐 웃어줘야 해.’라며 일부러 계산해서 던진 적도 있었다. 이미 엄마인 자체로 아이에게는 완벽한 존재라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초조한 나에게 따뜻하게 말해주고 싶다. 네가 어떤 부족한 모습이라도 엄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아이에게는 매일 시행착오로 눈물 씻는 성장형 엄마로도 너무나 충분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