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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편지

9. 밤손님

by juyeong

왜놈 닻이 조선 바다를 할퀴었다.

정박한 배에서 쏟아진 이상한 것들, 행운의 편지, 전기, 전화, 수많은 쌍놈…

그것들이 매일 조선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코우즈키도 배를 타고 왔던가?

일본인 갑부가 어쩌다 경성으로 흘러들어온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민우는 그날 밤 넘겨버린 편지를 찾아

코우즈키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샅샅이 뒤졌는데

며칠째 빈손이었다.

연신 내쉬는 한숨에, 말 그대로 땅이 꺼졌다. (관이가 거기 발이 걸려 몇 번을 넘어졌는지. 무릎이 푸르딩딩했다.)


그리하여 모두가 잠든 새벽, 고운이 그 집을 바라봤다.

대문 근처로, 길목 곳곳에 순사가 있었지만

누구도 검은 옷을 입고, 그림자 아래 선 고운을 발견하지 못했다.


계획은 단순했다.

‘편지를 가지고 나온다.’


그러나 담쟁이덩굴이 감싼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고운은 문손잡이 한 번 잡아보지 않고, 집을 등진 채 걸어갔다.

한 걸음, 두 걸음, … 스무 걸음 남짓 멀어졌을 때,

뒤를 돌았는데

부스럭.

소리가 났다.

새끼들을 품은 어미 고양이가 자고 있었다.


그들이 잠에서 깨지 않도록,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고운은 조용히 그러나 힘차게 도움닫기를 해 껑충 뛰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은 담벼락을 단숨에 넘은 그는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시장 사람들은 코우즈키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배달이요.


과일, 고기, 쌀을 갖고 오가며 본 것들,

새로운 그림이 걸렸네, 전화를 바꿨네, 변소가 우리 집보다 좋더라, 종알종알 떠들기 바빴다.

아마 그 소리에 붕대로 두 눈을 감싼 춘숙까지 코우즈키 집을 속속들이 알 터였다.

그리하여 고운은 그들의 말을 떠올리며 별관 서재, 일층 응접실, 좌측 계단을 망설임 없이 올라가 삼층 쪽문 앞에 멈췄다.


방인지 농(籠)인지 모를 좁은 곳에 감색 옷을 입은 소녀들이 누워있었다.

손을 잡고 엉겨 잠든 아이들은, 서로의 온기로 추위를 달래는 듯했다.


그리고 구석에 홀로 잠든 아이가 있었다.

어깨가 아플 만치 잔뜩 웅크린 아이는, 손에 편지를 쥐고 있었다. 민우가 잃어버린 행운의 편지였다.


고운이 조심히 다가가 편지를 잡으며, ‘됐어.’ 생각했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었던가,

똘똘 뭉쳐 있는 아이의 가장 가운데,

서연이 눈을 번쩍 떴다.

꺄.

비명은 빠르게 전염됐다. 입에서 입으로. 눈에서 눈으로.

아이들은 차례로 소리를 지르며 눈을 뜨더니, 숙희마저 눈을 떴다.


-뭐야. 누구야.


문이 덜컹 열리고,

집사 아재가 들어왔을 때 고운은 사라진 뒤였다.

빈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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