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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편지

12. 수신

by juyeong

김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운은 밖으로 나섰다.

병원으로 내달리며, 옷 주머니에 손을 넣어 칼을 확인했다. 만주에서 받은 이래 몸에서 떨어뜨린 적 없지만, 어떤 습관, 다짐, 같은 거였다.


만주 기억은 복잡다단해, 고운은 머릿속을 헤집을 때마다 늘 다른 것을 떠올렸다.

서늘한 날씨, 뜨거운 마음, 반복되는 충성과 배신, 고단한 훈련, 따가운 잔소리


-그렇게 휘두르지 말고, 팔을 뻗어. 딱 한 뼘만 더.


총잡이한테 칼질 운운하는 놈은 이민형뿐이었다.

너는 너무 아껴. 동작도 아끼고, 말도 아끼고, 마음도 아끼지.


-너라면 이것도 아껴줄 것 같아서.


총잡이한테 칼을 맡기는 놈도 이민형뿐이었다.

다녀올게. 그 말을 끝으로 민형은 상해로 떠났다. 그리고


-고운아.


상해에서 고운이 민형에게 총을 겨누었을 때, 너는 내 이름을 말한 것 같았는데.

고운은 백화점 상품권 판매 상자에 들어가 늘 그 순간을 생각했다. 좁고 어두운 곳을 싫어하는 고운은, 그 안에서, 그러니까 가장 싫어하는 곳에서 가장 괴로운 순간을 곱씹었다.

스스로에게 주는 벌이라고도 생각했지만, 이것이 형벌이라면 형량이 너무 가볍지. 나는 끝내 용서받지 못할 거야.


마침내, 찬 바람을 맞으며, 다다른 병원.

고운은 병실 하나하나를 살폈으나 김씨가 말했던 아이와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너무 늦은 걸까?

이미 돌아간 걸까?

어디서 찾아야 하지?

그때, 진료실 앞에 앉은 아이가 피식 쓰러졌다. 땀에 젖은 머리, 창백한 얼굴, 단추 달린 옷, 바람에 들춰진 옷 아래 균일한 너비의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게 보였다.

너구나.

그런데 아이를 치료하러 온 게 아니었어?

진료실에 들어간 건 남자였다. 남자 사람 아니, 그 개새끼는, 아이를 때리다 제 손에 난 생채기를 치료하러 온 거였다.


치료를 마친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누군가, 아이에게 다가가는 그의 옷에 물을 쏟았다.

웬 놈이야. 바로 돌아봤건만, 우루루 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누가 저지른 짓인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하는 수 없이 화장실로 향했는데


-언 놈인지 물 쏟은 걸 잡아다, 애새끼처럼 혁대 길들이개로 써먹어야 하는데.


거울을 보며, 옷을 닦는 그의 곁으로 검은 인영이 다가왔다. 고운이었다.

뭐야? 여자? 남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고운은 주머니에서 칼을 꺼냈다. 그리고 휘둘렀다. 남자를 향해, 한 뼘 더.

칼 손잡이에 피가 튀었다. 지난번, 여우를 잡고 깨끗이 닦았건만, 또.

그래도 이민형, 새겨진 이름이 얼룩지지 않았으니 그걸로 되었다면서 고운은 남자 목에 찌른 칼을 비틀었다.

눈빛이 흐릿해지는 남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리 내 물었다. 뭐야 너.


-인사 전해달래. 잘 가라. 개새끼야. 라고.


수신,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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