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행운의 편지

19. 어떤 마음

by juyeong

민우야, 뛰지 마. 아주머니의 말소리가 무색하게 국숫집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는 점점 커졌다. 날래다 날래. 도토리를 발견한 다람쥐처럼 우다다 달려와 문을 연 민우는


-누나,


쿠바 리볼버가 군인에게 다녀갔단 얘기를 하려 했는데, 고운의 깨진 이마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어떡해. 한참 호들갑 떨던 녀석은 약상자를 꺼내 왔다.


-됐어. 놔두면 아물 거.

-안 돼. 흉 진단 말이야.


한사코 거절하던 고운은, 민형과 똑같은 소리를 하는 민우에 결국 두 손 두 발 들었다. 형이고 동생이고. 본인이나 챙길 것이지. 고운은 민우의 비뚤어진 모자를 바로 해주며, 말을 삼켰다.

푸하하. 시원하게 터지는 웃음소리나, 볼 때마다 신기한 젓가락질, 아무리 짧게 다듬어도 삐쭉 뻗치는 머리칼. 고운은 하루에도 몇 번씩 민우에게서 민형을 보았는데.

민우야, 너는 나와 민형 사이의 일을 알면 뭐라고 할까. 나는 언제까지 너를 기만해야 할까.


-누나 왜? 뭐 할 말 있어?


너무 빤히 바라본 모양이지. 고운에게 묻는 민우의 볼이 불그레했다.


-… 만약에 말이야, 너랑 내가 한 사람에게 각각 편지를 받기로 했어. 그런데 편지가 바뀌어서 온 거야. 너한테 보낼 걸 나한테. 나한테 보낼 걸 너한테. 그런데 내가 편지를 받은 적 없다고 잡아떼면, 그건 어떤 마음일까?

-글쎄.

대신 받아주길 바랐나?


고운은 통화 끝에 남긴 아이의 말이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혹시 또 편지가 오면 전화 주시겠어요?'


한낮의 시장은 오가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었다. 팔아요. 깎아줘요. 시끌시끌하기가 무색하게 쌀집 아지매는 고개를 흔들며 졸고 있었다. 오랜만의 단잠이었다.

고운은, 떠난 딸의 옷을 쥐고 곤히 잠든 아지매의 마음을 조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군인에게 달려가며 찬 바람을 맞을 때, 고운은 숨이 막혔고, 동시에, 아주 오랜만에 숨이 쉬어졌다. 만주 들판을 내달렸던 때처럼.

백화점의 상품권 상자 안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생동감이었다.

일곱 통의 편지를 모두 처리하고 나면, 나도 민우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까? 끝내 민형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고운은 공중전화로 들어갔다.


코우즈키가 외출한 집.

마지막 편지를 가진 숙희가, 코우즈키 딸의 수발을 드는데, 전화가 울렸다.

간절히 기다리던 전화가.

keyword
작가의 이전글행운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