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행운의 편지

22. 겨울꽃

by juyeong

코우즈키 집 화분은 겨울에도 꽃이 피었다.

겨울에 꽃이라니. 서연이 담장 밖에 살 땐 상상도 못 한 얘기였다.

겨울만 그래? 봄에도 반쯤 죽은 나무 속껍질 뜯어먹기 바빴지.

그걸 빻아다 먹으면 말 그대로 똥구멍이 찢어졌다.

하지만 속껍질을 못 구하면, 배를 곯고, 허기와 취기에 눈이 뒤집힌 아버지는 손을 들고, 두꺼운 손에 얻어맞으면 피부가 찢어졌다.


상처에 바를 약 하나가 없어서,

엄마는 치맛단을 찢어 서연의 상처에 덮어주었다.

날이 갈수록 치마가 짧아지는 엄마의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멍으로 얼룩덜룩했다.


사는 게 지겨운 서연에게 단 하나 궁금증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이 시궁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저 작자는 무슨 돈으로 술을 처먹고 지랄을 떠는 건지. 였고.

이왕 마시는 거 저렇게 깔짝깔짝 말고 술독에 확 빠져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게 유일한 바람이었다.


그날도 아버지 손바닥을 피해 달아나던 길이었다.

맨발로 뛰던 서연은, 어떤 남자와 부딪쳤다.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동네 사람이 아니네.

남자는 식모살이할 여자애를 구하는 모양이었는데, 이제 와 생각하자면 좀 이상했다.

바느질은 잘하는지, 칼질은 능숙한지, 이런 덴 관심도 없이 여자애 키와 생김새를 유심히 봤다.

그가 서연에게 한 말은


-키가 좀 크네. 아쉽게.


그뿐이었다.

당장 다리를 분질러 키를 줄일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서연은 무릎을 꿇은 채 매달렸다.


-저요. 제발 나 좀 데려가 줘요.


그런 서연 곁에 누군가 또 무릎을 꿇었다.


-네. 얘 좀 데려가 주세요.


두 손을 싹싹 빌며 애원하는 건, 엄마였다.


그 덕에 처음으로 차를 탔다.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는 차가 연신 흔들렸지만 서연은 조금도 멀미하지 않았다. 울렁이는 건 오로지 마음이었다. 마침내 이곳을 떠나는구나. 하는 마음.

엄마는 멀리서 경성으로 향하는 서연을 바라봤다. 어떤 말도, 표정도, 손짓도 없었지만, 서연은 온몸으로 그녀의 인사를 느꼈다.

가. 서연아. 가. 돌아보지 말고 가.

그리고 망할년 도망친다며 쫓아오던 아버지, 비틀거리며 뛰다 술독에 빠진 그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식모살이는 꽤 바빴다.

같이 지내게 된 아이들은 이상한 텃세를 부렸다.

하지만 서연은, 서연이었다.

지겹게 먹은 나무 속껍질이 서연의 마음에도 껍질을 둘렀는지

어떤 지랄을 마주해도 작은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인사해라. 이쪽은 너희와 함께 지낼 아이 숙희다.


어느 날, 그 애가 이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


-안녕하세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행운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