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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편지

3. 아닌 밤중에 홍두깨

by juyeong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쌍놈을 쌍놈이라 부르지 못해 답답한 누군가가

‘쌍놈의 히로시’

종이에 적어, 함부로 마구 구겨, 있는 힘껏 던진 모양이었다.

사람들 발에 치이고 밟힌 종이를 주워 든 건 애석하게도 히로시였다.


-누구야!


시장 한가운데 씩씩거리며 선 히로시는 싸움판에서 뛰쳐나온 소 같았다.

실로 우스꽝스러웠으나, 모두 웃음은커녕 단단히 숨을 죽였다.

잘못 걸렸단 뼈도 못 추슬러.


그런 히로시 눈에 든 것은 하필 관이었다.

다친 몸을 회복하고 며칠 만에 시장에 왔건만. 공부 못해도 착한데… 재수가 없는 녀석.


-니놈이구나?!


전일 제게 죽도록 얻어맞은 관이 낙서를 했구나, 생각이 든 히로시는 주먹을 들었다.

바닥에 관의 피가 흩어지는데,


하하하.

때아닌 웃음소리가 들렸다. 춘숙이었다.

그녀는 어떤 험한 일을 겪었는지, 정수리부터 눈 밑까지 칭칭 붕대 감고 있었다.

눈이 없이, 속도 없이, 그저 시장 귀퉁이 앉아 있는 게 일인 사람이 낙서라니. 말도 안 됐지만


-너야?


분노에 찬 히로시는 두 눈 멀쩡해도 뵈는 게 없었다.

대답이 없는 춘숙에, 저를 놀려먹은 값을 후하게 쳐주겠노라, 히로시가 길바닥을 구르는 홍두깨를 잡은 순간

끼익.

일각 사진관 문이 열리고, 안에서 나온


-코우즈키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성에서 지내는 일본인 중 손에 꼽히는 갑부 코우즈키.

사진사와 몇몇 사람들이 그를 향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곁에 그의 딸로 보이는 아이는 무언가 거북한지, 고개를 숙이고 구두만 쳐다봤다. 햇빛에 반짝이는 예쁜 구두는 발에 조금 큰 듯했다.

그만 가지. 아이를 데리고 돌아서는 코우즈키가 히로시와 눈이 마주쳤다.

강약약강 히로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여기 계신다기에, 돌아가실 길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종로서 히로시입니다.


그렇구만. 코우즈키는 흡족한 얼굴로 유유히 떠났다.

괜찮은 동아줄을 잡았다고 생각한 히로시는 난장질마저 그만두고 쾌활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 다시는 시장에 들어서지 못했다.


히로시의 시신이 발견된 날, 낯선 얼굴이 시장에 왔다.

중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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