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수라장
며칠 뒤 홍씨가 겨우 눈을 떴을 때, 그는 저를 둘러싼 얼굴들에 흠칫했다.
뭐지. 내가 누구한테 빚을 졌던가. 아님, 받을 돈이 있었던가.
- 정신 차렸으면 말 혀, 어떻게 된 겨?
홍씨는 그제야 화장실 혈투가 떠올랐다. 나카무라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았으나, 죽음을 무릅쓴 치열한 싸움… 이긴 했으니, 혈투가 영 틀린 말은 아니지.
아무튼 어떻게 되었더라. 첫 번째 주먹에 코피가 터졌고, 두 번째 주먹에 광대가 깨졌고, 세 번째 주먹에 눈앞이 깜깜해졌고, 그렇게 한참을 맞다 바닥에 쓰러졌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다리를 주욱 끌었다. 우편국 복도 천장을 바라보면서, 아, 저승은 발목 잡혀 끌려가는 거구나 싶었는데. 지금 살아있는 걸 보니
- 아무래도 쿠바 리볼버가 날 데리고 나온
뭐래 너 춘숙이가 데려왔어. 누구? 춘숙. 앞도 안 보이는 사람이 난지 어떻게 알고? 몰라. 하늘에서 떨어졌다던데?
- 저러다 사람 죽겠네.
- 안에 누구누구 있어요?
고운은, 홍씨가 나카무라에 맞고 있단 얘기에 화장실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문이 열리면서 홍씨가 쏟아져 나왔다. 상반신은 화장실 안, 하반신은 화장실 밖에 걸쳤으나, 가느다랗게 숨이 붙어있었다. 얻어맞은 꼴을 보아 나카무라는 홍씨를 살려둘 생각이 없는 듯했고.
그래서 고운은 나카무라가 홍씨를, 홍씨가 저를, 보지 못하게 얇은 목도리로 대충 얼굴을 가리고 조용히 발을 끌었다.
그리고 미동도 없이 우편국 귀퉁이에 서 있는 춘숙에게 홍씨를 안겨주었다.
- 데려가요.
그 말만 남긴 채 고운이 화장실로 돌아가고
펑.
화약에 비할 수 없으나, 나카무라의 숨을 거두기엔 충분한 폭발이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던데, 똥 밭에서 죽은 나카무라도 그렇게 생각할까. 진심으로 궁금하진 않았던 고운은 미련 없이 화장실을 나왔는데
- 저거 잡아! 목도리!
폭발을 들은 순사들이 어느새 화장실로 뛰어왔고, 소 뒷걸음질에 쥐 잡는 격이라고 곧바로 고운을 가리켰다. 쳇.
편지 보내려는 사람으로 미어터지던 우편국은 먼저 탈출하려는 사람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고운이 목도리를 풀어헤치며 인파 사이로 들어갔고, 순사들도 뒤를 따랐으나, 밀고 밀치고 깔고 깔리는 통에 이러다 다 죽어. 그때
삑.
모두를 얼어붙게 만든 순사의 호각 소리.
- 여기 있는 놈들 가방이든 주머니든 다 확인해. 찾아 목도리.
순사들은 문을 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폈다.
어쩌지 누구에게 넘길 수도 없고. 어떻게 빠져나갈까 고운이 고민에 빠진 그때. 바닥에 떨어진 붕대가 보였다. 춘숙이 떨어뜨리고 갔나? 가긴 잘 갔나?
이제 곧 고운이 문으로 향할 차례였다.
그러나 어느 하나 천천히 현관을 나서는 고운을 붙잡지 않았다.
얼굴을 붕대로 칭칭 동여매고, 얼룩을 묻힌 고운을 더럽다고 멀리했지.
다만, 우편국에서 조금 멀어진 고운이 뒤를 돌았을 때, 창문에 누군가 서 있었다.
나를 보는 걸까.
지친 경성을 보는 걸까.
고운은 길게 한숨을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