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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편지

32. 회동

by juyeong

형.

잘 지내?

나는 아주 잘 지내.

경성은 걱정하지 마.

내가 형 죽인 놈의 편지를 쫓고 있어. 잡아서 꼭 복수해 줄게.

아! 히로시 형. 나 오늘 형이 죽기 전 만났다는 코우즈키 집에 가는데.

왜. 경성 최고 갑부랑 연 생겼다고 나한테 자랑했잖아.


- 그 말이 맞네.


타쿠야는 코우즈키 집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은 담벼락이 인상적이었다.


- 내리시죠.


차가 멈춰 서고

타쿠야는, 형 히로시에게 쓰던 글을 끝내지 못한 채 수첩을 접었다.

문 앞을 지키던 순사의 경례를 뒤로 하고 안으로 향했을 때,

새앙쥐 같은 여자아이들이 바삐 돌아다니고 있었다.


코우즈키 집엔 차례로 손님들이 도착했다.

무섭게 생긴 남자, 키가 큰 남자, 머리가 민둥산인 남자, 젊은 남자, … 죄다 경성에서 한 자리씩 하는 놈들이었다.

덕분에 소녀들은 며칠째 정신없었다.

청소하고 음식하고 정리하면, 또 청소, 요리, 빨래가 기다렸다. 어디서 이자라도 붙는지 일은 마냥 늘어나기만 했는데.

후.

지친 아이들을 어르는 건, 수다. 그중에서도 숙희 얘기였다. 굳이 뒤에서 속닥일 생각도 없이,

그렇고 그런 사이래.

떠드는 말은 자연스레 집사 아재 귀에 들어갔다.


-아무 말도 하지 말거라.

참 네 오라비 말이다. 경수. 따로 연락 없고?


집사 아재는 오라버니 얘기로 대번에 숙희 입을 다물렸고. 그래서 숙희는 이번에도 침묵을 지켰다.

누군가 옷에 물을 뿌리고

누군가 청소한 곳을 다시 엉망으로 만들고

누군가 밥을 숨겨도

조용히 지냈다.


-숙희야. 잘 지내. 잘 지내고 있어. 오라버니가 꼭 데리러 올게.


오라버니의 말과, 그가 남긴 책만 붙든 숙희는


- 손님 오시니 준비하렴.


오늘은 코우즈키 어르신 명으로 삼층 복도 끝방에서 언니 옷을 입었다.

예쁘고 비싸고 불편한 차림으로 마당에 나왔을 때

풍덩. 소리가 들렸다.

풍덩. 흔하디 흔한 소리였지만 어쩐지 숙희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가 며칠을 고생하며 닦은 연못 곁에 서연이 있었다. 사탕을 물어 볼록한 볼을 한 서연은 숙희를 보자 빠르게 달아났다.

왜.

이상한 기분에 이끌려 연못으로 다가가니, 물아래 가라앉는 게 보였다. 오라버니 경수가 준 책이었다.


- 안 돼.


첨벙.

숙희는 그대로 연못에 들어갔다. 차가운 물에 머리가 찌릿했지만, 그런 줄도 몰랐다. 제발. 제발. 수초를 헤쳐 목숨보다 귀한 책을 건지고 나오자

정원에 이른 손님 모두가 숙희를 보고 있었다.

어르신의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숙희의 몸이 달달 떨렸다. 추위 때문인지, 그 눈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 괜찮니?


담장 구석, 책을 안고 쪼그린 숙희에게 드리운 목소리.

숙희는 후다닥 일어났다.

놀래키려던 건 아니었는데. 숙희를 부른 남자는 머쓱한지 눈썹 끝을 긁었다.


- 뭐 필요하신 거라도.


고개를 저은 그의 손에는 손수건이 있었다.

이걸 대고 다리면 빨리 마를 거야.

감사합니다.

문득, 숙희는 자신이 그와 대화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 조선 분이신가 봐요.

- …

- 아니신가요?

- 소공녀. 좋은 책이네.


태영. 부르는 소리에 그가 돌아섰다. 숙희는 태영이 준 손수건으로 책을 감싸며 읊조렸다. 소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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