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아디오스
- 언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내가 뒤밟는 걸 봤나? 설마 집사 아재가 나를 눈치챘어? 미친 그 양반이 회초리 대신 다른 걸로 때렸나? 고운의 머릿속이 뒤죽박죽 꼬인 그때.
- 오늘 잘 지내요.
이런 말을 한 번도 안 한 거 같아서요. 숙희는 전화를 끊었다.
고운은 멍했다.
기뻐야 했나. 그래 아마도. 숙희와 깨나 친해졌으니 이제 밖으로 불러내 편지를 되찾을 수 있었다.
아니. 굳이 불러내지 않아도 심부름 길에 붙잡아다가 편지를 빼앗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숙희가 어떤 애야. 한주먹거리 아니야.
- 오늘은 꽃이 피었네.
길가에 핀 꽃을 보고 앉아 향기를 맡는 아이의 주머니에서 편지를 빼내려다가
데구루루.
무거운 짐에서 떨어진 감자를 주워 건네며 붙잡으려다가
멈칫. 고운은 아무 말도 않고, 숙희 주머니에 감자를 넣어주었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아이의 작디작은 그림자를 보듬기밖에 못했다.
- 나는, 가짜야. 네 오라버니 동무 아니고. 편지 받은 적도 없어.
고운은 연습했다. 목소리를 높여도 보고, 낮게도 해보고, 타일러도 보고, 눈을 감기도 하고, 아무튼, 한 번만 냉정하면 되는데.
잘 지내라는 인사가 뭐라고.
숙희를 보면 말이 쏙 들어갔다. 그저, 민형의 칼을 만지작거리며 너라면 어땠을까. 읊조릴밖에.
밤.
잠에 든 고운은 철컥. 머리에 닿는 차가운 감촉을 느꼈다.
눈을 떴는데도 민형이 보이는 걸 보니, 여전히 꿈이었다.
오늘 이마에 닿은 건 총구가 아니었다. 얼음장보다 차가운 민형의 손이었다.
- 민형아.
오늘은 불러도 사라지지 않네.
- 깼어? 머리칼이 흘러내려서 넘겨준다는 게. 내 손이 너무 찼지?
- …
- 왜. 나 때문에 화났어? 그만 가?
- 가지 마.
나, 아직 내가 널 죽였다는 얘기 민우랑 아주머니한테 못했어.
- 괜찮아.
- 상해에서 널 잡았던 그 군인 놈도 잡지 못했어.
- 괜찮아.
- 나, 더는 총을 못 잡겠어. 그리고 또
- 고운아.
고운은 눈물이 차올랐다. 민형의 얼굴이 자꾸만 흐릿해졌다. 그럼 안 되는데. 조금이라도 더 봐야 하는데.
-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잘 지내.
그거였다.
그날 상해에서 고운이 마지막으로 민형을 겨누었을 때, 그는 온몸을 포박당한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어딘가에서 총을 겨누고 있을 고운을 찾아서.
그리고 마침내 고운을 발견했을 때 민형은 씨익 웃었다.
우리는 홀로 작전에 나가면, 서로에게 편지를 보내 잘 지내라 당부했지만,
얼굴을 보고 있을 땐 그 말을 건넨 적 없었다. 같이 있으면, 잘 지내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그날 네가 잘 지내라고 인사를 했구나. 그게 끝이라서.
- 가지 마.
내가 어떻게 행복해. 너 없이 어떻게 잘 지내.
잠에서 깬 고운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