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빨간 천 줄까. 파란 천 줄까.
- 누나, 우리 학교 화장실 맨 끝 칸에 귀신 나온대.
- 맞아. 밤늦게 나타나서 물어본다는 거야. 빨간 천 줄까. 파란 천 줄까.
낭설을 쏟아놓는 민우와 관이의 얼굴은 늘 그렇듯 진지했다.
그들 앞의 고운 또한 평소처럼 무덤덤했고. 다만, 빨간 천 파란 천은 무슨 뜻일까 의문이 들었는데, 금세 사그라들었지 뭐.
해가 졌다. 학교 복도에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교무실에 선생들이 하나둘 퇴근하고, 남은 건 마츠모토뿐이었다.
- 관이 같은 얼빠진 새끼가 또 있나 했더니, 지 애비를 꼭 닮았구나.
남들 앞에서 점잖은 체하던 그는, 들을 사람도 없겠다, 온갖 것을 흉보는 중이었다. 본국에 있는 친인척부터 교장, 동료 교사,
- 조선 놈들은 글씨마저 이따위로 생겼어.
종이 위로도 푸념이 쏟아졌다.
그것이, 마츠모토가 제 손으로 학도병 서류에 관이 아버지 서명을 그려 넣는 중이기도 했거니와
그 주변엔 지금껏 망친 종이가 수두룩하게 버려져 있었다.
이마에 땀이 삐질 날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이번 종이.
이제 밑변만 그으면 완성이었는데.
들숨 날숨조차 조심해서 쉬는 노력이 무색하게 펄럭. 바람에 종이가 날렸다.
그가 날아간 종이를 주워 확인하자, 서명 위로 선이 찍 그어져 있었다. 이렇게 공든 탑이 무너지는구나.
- 젠장칠!
성이 난 그가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복도 쪽 창문이 열려 있었다.
저건 또 언제 열린 거람.
씩씩거리며 새 종이를 꺼내 자리에 앉던 마츠모토는 의자에 궁둥이가 닿기 전에 도로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다. 일말의 가능성을 차단해야지.
그는 학교의 모든 창을 굳게 닫으려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날은 그새 더 어두워져 있었다. 손전등 없이는 한 치 앞도 안 보였는데.
윙.
어디선가 바람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네, 방금 복도 끝 마지막 창문까지 굳게 닫힌 걸 모두 확인했는데. 그리고,
휙.
모종의 기운을 느낀 마츠모토가 빠르게 몸을 돌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더 이상하네. 분명, 뒤통수가 따가웠는데.
쥐라도, 아님 벌레라도 있었어야 하는데.
- 설마, 귀신인가.
그도 들었다. 화장실 가장 안쪽 칸에 귀신이 나와서는 ‘빨간 천 줄까. 파란 천 줄까.’ 물어본다는 그 소문.
사람들 앞에선 흥. 그러라지. 천이란 천은 몽땅 받아 코를 팽 풀어줄 테다. 겁이 안 나는 척했지만, 실은 귀신이라면 다리가 벌벌 떨리는 마츠모토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검은 형체가 어른거렸다.
팔을 움직이는 듯한 희미한 형체. 그 순간
슝.
마츠모토 머리 옆 벽에 무언가 날아와 꽂혔다. 칼이었다. 손잡이를 파란 천으로 감싼 칼.
헉.
마츠모토는 놀라 도망치려 했으나, 몸을 틀기 무섭게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슝. 꽂히는 다른 칼.
이번엔 칼 손잡이에 빨간 천이 감겨 있었다.
헉.
으아악. 마츠모토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관이와 아버지가 집에 돌아갈 무렵 학교에 숨어든 고운은, 마츠모토가 홀로 남을 때까지, 인적 없는 화장실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귀신은 나타나지 않았는데,
빨갛고 파란 천 생각에 화장실 칸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장 구석에서 누군가 숨겨 놓았을 걸 찾아냈다.
천은 하나였고, 붉고 푸른 물감으로 동그랗게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태극무늬였다.
그 아래, 또렷이 적혀 있는 건,
대한독립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