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양반 놀음과 양반 딸
아가씨.
그즈음 사람들은 고운을 아가씨라 불렀다.
넘치는 돈을 주체 못 한 개차반 양반이
기어이 족보를 산 탓이었다.
고운은, 처음 족보를 보고
길에 다니는 양반 작자들이
다 제 아비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여기도 개차반, 저기도 개차반.
세상은 요지경, 세상은 조지경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겠네, 싶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긍정적인 효과라면
‘양반’이라는 말에서 무게를 느꼈는지 개차반이 조오금 잠잠해졌다.
그토록 좋아하는 개떡을 들고 걸어가다
그를 못 보고 쳐버린 남자에
툭,
떨어진 떡.
- 어이쿠 죄송합니다.
- 너, 너,
- 정말 죄송합니다 나으리.
원래 같으면
너 이게 어떤 개떡인 줄 알아?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야, 니놈 곁에 있는 아들내미를 땅에 굴려도 내 성이 안 차 등등
줄줄 이어질 격조 낮은말을,
나으리,
그 한마디에 삼켰다.
엣 헴.
고은은, 개차반의 젠체하는 헛기침이 거슬렸지만,
가까스로 평화로워진 일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 너는 양반 딸이 되어 가지고 그 따위로 다닐 거야?
하는 수 없이 망할 놈의 양반 놀음을 좀 맞춰주기로 했다.
함무라비 고운도, 골목대장 고운도 다 접고
으레 다른 집 아가씨가 그러하듯
고운은 망아지같이 뛰기를 멈추고,
머리칼도 길러 묶었으며,
조용한 집고양이 행세를 했다.
- 아, 갑갑해.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하고 심심한 날들을 보내는 중
- 이거
고운 앞에 개떡이 들이밀어졌다.
지난번, 개차반과 부딪혀 개떡을 떨어뜨리게 했던 남자의 아들내미.
지지난번, 들개에 놀라 비명을 질렀던 남자아이.
민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