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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의 편지

57.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길 바라진 않았지만

by juyeong

고운은 기가 막혔다.

아버지를 죽이고 총자루 몇 챙겨서 조선 땅을 떴는데

독립운동 기지에서 제일 먼저 맞닥뜨린 사람이 하필 민형이라니.

고운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씩씩거리는 민형에

이제 내가 맞아 죽을 차례구나 싶었다.

그것이 오늘일지, 내일일지의 문제였을 뿐.


허나 민형을 제하더라도,

이곳엔 고운을 못마땅히 여기는 사람 천지 빼까리였다.


- 딱 보면 안다. 저거 사람 못 죽인다.

- 저거 입을 조가비처럼 꽉 다문 게, 실은 밀정 아이가?

- 됐고. 독립운동할 싹수가 아니다. 빨리 내보내라.


고운은 저를 둘러싼 모든 이야기들에 침묵했다.

혈족 살인도 살인이라면 경험치 없잖고.

경성 골목대장 출신으로 누구보다 큰 목소리를 낼 자신도 있다만.

독립운동. 이라는 말이 조금, 걸렸다.

애시당초 순수하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과

아버지가 죽인 사람들의 목숨 빚을 갚으려는 나.

고운은 그들과 자신을 차마 같은 선상에 둘 수 없었다.

그래서 나날이 고개를 더 숙였는데.


- 악!


민형은 고운을 향해 촉새처럼 입을 놀리는 동지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전부터 눈에 거슬리던 걸 응징했을 뿐이라 했지만,

그가 손을 본 이들은 하나같이 고운을 타박한 사람이었다.

허나 민형은, 지독한 훈련에서 늘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었기에

누구도 그에게 반기를 들지 못했다.

들개가 무서워 울던 소년은 어디 가고. 악만 남은 건지.

고운은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게다가,

콩이 콩을 틔우고

팥이 팥을 열매 맺듯

응징은 응징을 낳아

고운을 보는 사람들의 눈도 나날이 가늘어졌다.


결국, 미친 듯이 비가 오는, 산꼭대기를 찍고 오는 훈련이 있는 날.

고운은 누군가의 악의로 보급품을 전달받지 못한 채 훈련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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