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from 책 to 나.

by stay gold



이야기를 쌓아 나갈 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사용하는 단어의 정의. 특히 중심이 되는 단어에 대하여 쓰는 이와 읽는 이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어야 이야기를 쌓아갈 수 있다.


책과 독서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책

1 종이를 여러 장 묶어 맨 물건.

2 일정한 목적, 내용, 체재에 맞추어 사상, 감정, 지식 따위를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여 적거나 인쇄하여 묶어 놓은 것.

3 옛 서적이나 여러 장의 종이를 하나로 묶은 것을 세는 단위.


*독서

책을 읽음



이제 몇 가지 질문.



1. 인터넷 블로그나 커뮤니티의 수다를 프린트하여 제본한 뒤 그것을 읽는 것을 책을 읽는 것, 즉 독서라 할 수 있는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은 ~이다’와 같은 단편적 지식들이나 인터넷 뉴스 기사를 모아 묶어 읽는 것을 독서라 할 수 있을까.


할 수도 있을 테고, 혹은 아니라 말할 수도 있을 것.


1-1. 독서라 할 수 있다.

인터넷의 단편적 지식이나 수다글 등도 이를 모아 제본하여 읽는 경우 독서일 수 있다면 독서냐 아니냐는 a. 화면 속 낱개의 글을 읽느냐, b. 한데 묶인 프린트물을 보느냐의 문제. 다시 말해, 전달하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구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더욱 효율적인 전달 방식이 있는 경우 굳이 비효율적인 방식을 택해야 할 까닭은 무엇일까.


그때그때 화면 속 낱개의 글을 읽으며 원하는 것을 얻는 편이 이익일 수 있다. 시간과 비용, 편리 모두 이쪽이 낫다. 아니, 굳이 눈으로 읽을 필요 없다. 유튜브 강연을 듣는 것으로도 좋다. ‘독서의 목적은 논쟁에서 승리할 근거를 얻는 것도, 지식을 늘리기 위한 것도 아니다. 독서의 진짜 목적은 깊게 생각하는 데 있다‘라는 베이컨의 말을 떠올리면, 주제나 소재를 곱씹어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독서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지 않은가.


이러한 이유로, 책을 읽지 않는다며 자책하는 이들에게 “굳이 억지로 책을 읽을 필요 있나요~ 예전에야 책 외에는 달리 전달할 방법이 없었으니 독서를 강조했지만 이제는 보다 효율적인 대체재가 충분한데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독서라는 단어에 따라붙는 감성, 자기만족 등등의 포장지를 걷어내면 대체재도 충분히 합리적일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하여 취득한 단편적 지식으로 알은체 하는 행위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있지만, 그건 책도 마찬가지.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취득하는 사람의 문제일 것. 어떤 사람은 스스로 검증하고 사고하는 과정을 통하여 인터넷의 단편적 지식으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결과를 이끌어낼 테고, 어떤 사람은 교육 기관에서 공부하고도 그 결과는 참담한 수준일 수 있을 것.)



1-2. 독서라 할 수 없다.

인터넷 블로그나 커뮤니티의 수다를 프린트하여 제본한 뒤 그것을 읽는 것은(이하 *가*) 독서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로 따지면 독서는 ‘책을 읽는 것’을 뜻하므로 *가*가 독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첫째, 인터넷 블로그나 커뮤니티의 수다를 프린트하여 제본한 것은 책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둘째, 저런 글들도 묶어 놓으면 책이긴 하지만 이것을 읽는 것은 독서의 범주에 들어가는 읽는 행위와는 서로 다른 것이라 생각하거나,

셋째, 책도 아니고, 읽는 행위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를 살펴보면, 사회에서 통용되는 책이란 단어에는 사전적 의미 외에 좀 더 갖춰야 할 조건이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예컨대, ’일정 수준 이상의 사고력, 논리력, 감성 등이 검증된 글의 집합‘과 같은 조건이 암묵적으로 통용된다면 상당수의 인터넷 글은 모아서 제본해도 책의 범주에 들지 못할 것.

그리고, (이 점이 흥미로운데) 적잖은 책들도 위와 같은 엄격한 기준으로 따지면 책의 범주에 들지 못할 것. 이 경우, 가려낼 안목이 없는 독자는 책이라 분류된 것을 사서 읽지만 사실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닌 헛수고를 할 수 있다.(쇼펜하우어 ‘문장론’ 참조)


둘째를 살펴보면, ‘책을 읽음‘에서 읽음을 단순히 글자를 읽고 문장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보다 심도 있는 어떤 행위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엇을 읽느냐보다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하다’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시대를 초월한 명저라도 읽는 이가 얕은 수준의 읽음에 머무는 경우 독서라는 행위를 충분히 했다고 볼 수 없다. 흡사 목적어가 아닌 서술어가 잘못되어 비문이 되어버리는 것과 같다. 읽는 이에 따라 달라진다.

많은 책을 읽는다는 말이 우스꽝스러워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한 대상을 두고 얼마큼 읽었느냐를 따지는 웃픈 상황.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참조)


셋째는 생략.(첫째 + 둘째)



이제 마지막 질문을 생각한다.


책과 ‘책을 읽음’이라는 두 가지를 놓고도 위와 같은 질문들을 떠올리고, 상충하거나 또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각각의 유의미한 주장을 생각하고, 그중 일부는 직접 점검할 수 있으며, 이것들을 글로 옮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른 주제들은 어떠한가? 얼마나 많은 유의미한 주장들이 있을까?


나는 그 다양한 주장들에 대하여 충분히 공부하고 사색한 뒤 그 결과를 이야기하는가, 아니면 눈앞에 놓인 하나의 길을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여 ’이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외치는 것에 급급한가.


아는 것을 말하는가, 말하는 것을 안다고 착각하는가?

나는 정말 아는가?







성찰.

책으로부터, 나에게로.


feat. 소크라테스, 쇼펜하우어, 니체, 에리히 프롬, 그리고 데카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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