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볼 게 없어 몇 분째 애꿎은 채널만 계속 돌려대고 있다. 원래도 TV 볼 시간이 없는데 요즘 여러 가지 하는 일이 많아 한동안 아예 TV를 못 봤다. 오랜만에 혼자 집에 있으니 과자 먹으며 재미있는 프로나 보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쉬고 싶다. 볼 만한 게 있나 열심히 찾아봐도 리모컨 채널 누르는 손이 멈출만한 프로가 없다. 그런데 "나 옛날 드라마요"라고 대놓고 말하는 듯 화면조차 뿌연 '전원일기'를 두 채널에서나 해준다. '아니 그렇게 틀어줄 게 없나 저게 언제 적 드라마인데 누가 본다고 틀어줘?' 어려서 채널권이 없던 나는 (지금 아이들은 상상이 안 가겠지만) 무조건 할머니나 아버지가 보시는 채널을 봐야 했다. 전원일기,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6시 내 고향, 국악 한마당, 가요무대 등 도대체 저게 뭐가 재미있나 하는 것들을 할머니와 아버지는 즐겨 보셨다. '달동네'나 '수사반장' 같은 건 나도 재미있게 봤지만 두 분은 대부분 어린이 취향과 상관없는 프로를 좋아하셨다. 맨날 뻔한 내용의 갈등을 겪다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시작부터 끝이 예상되는 기대감 전혀 없는 드라마들이다. 새롭고 감각적인 드라마가 얼마나 많은데 요즘 같은 시대에 저런 걸 틀어주다니 코웃음이 나왔다. 저걸 틀어주고도 광고가 들어오나 의심이 갔다. 그런데 몇 바퀴를 돌아도 볼 게 없으니 그냥 포기하는 마음으로 전원일기라도 틀어놓고 빨래를 갠다. "오늘 멍 때리 긴 글렀네, 집안일이나 하자!" 그냥 흘려듣는데 대사가 자꾸 귀에 들어온다. 점점 고개가 돌아가더니 아예 빨래는 뒷전으로 밀어 놓고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았다.
전원일기는 중요인물인 김 회장 네 가족을 중심으로 양촌리라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오늘의 주인공은 김회장댁 큰아들 용진. 군청 살림 과장인 용진은 평소에 칼 퇴근해 항상 집에서 가족들과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요즘 들어 밤늦게 퇴근은 물론이고 술 마시고 오는 날도 잦아졌다. 연락도 없이 늦는 용진을 기다리다 가족들은 계속 늦은 저녁식사를 한다. 용진의 달라진 모습에 온 가족이 큰일이라도 난 듯 각자의 방식으로 걱정하고 용진을 살핀다. 새로운 부군수가 부임했는데 용진에게 너무 많은 양의 일을 시켜놓고 완성하면 퇴짜 놓고 완성하면 퇴짜 놓고 반복이다. 직원들도 무슨 똥개 훈련시키냐며 용진의 역성을 든다. 일도 일이지만 계속 퇴자만 놓는 부군수 때문에 용진은 자신이 무능력한 것 같아 스트레스가 심하다. 군청 직원의 귀띔으로 식구들이 용진의 상황을 알게 된다. 용진이 술을 잔뜩 먹고 새벽에야 들어온 날 기다리다 잠든 아내가 용진의 기척에 깼다.
용진 처: 늦었네요... 요즘 힘들죠?
용진: 내가 별 볼 일 없어서 미안해요.
용진 처: 당신이 왜 별 볼 일 없어요. 우리 식구는 당신 다 별인 줄 알아요.
용진: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그래도 버텨서 우리 식구 지킬 거예요.
용진 처: 당신은 가문의 자랑이고 어머니 훈장이에요. 가족들 뒤에 있어요 흔들리지 말아요.
이때부터 코끝이 찡해지고 안경 너머 화면이 더 뿌예지기 시작한다.
동생 용식은 어제 형이 읍내 포장마차에서 혼자 술을 먹고 있더라는 소리를 마을 사람에게 전해 듣고 다음날 한걸음에 달려가 형과 술 한 잔 하며 형의 처진 어깨를 펴주고자 갖은 애를 쓴다. 주말이 되자 김 회장은 벌초를 핑계로 아들 용진을 산에 데려가고 본인이 마음 뒤숭숭할 때 올라온다며 슬쩍 말을 건넨다.
김 회장: 많이 힘들었지?
용진: 좀 그랬습니다.
김 회장: 사는 게 평탄하기만 하겠니, 잊어버려라.
용진은 벌초 후 앉아 쉬며 아내가 아침에 나올 때 주머니에 찔러준 편지를 꺼내 읽는다. 기운 내라, 우리 가족은 당신밖에 없다. 힘든 것도 모르고 늦게 온다고 투정만 해서 미안하다. 뭐 이런 예상 가능한 내용이다. 이렇게 가족들의 위로를 받고 용진은 다시 기운 차린다. 용진의 얼굴빛만 조금 밝아졌을 뿐인데 온 가족이 집 나갔던 아들이 돌아오기라도 한 듯 다시 활력을 찾는다. 부군수는 더 좋은 곳으로 가려고 계속 연줄을 대고 있었는데, 결국 온 지 얼마 안돼 다시 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옮기게 되어 용진의 스트레스도 허무하게 끝이 난다.
이 뻔한 얘기에 눈에는 핏줄이 서고 코까지 빨개지며 휴지를 몇 개나 적셨다. 혼자 있었으니 다행이지 누가 옆에 있었으면 갱년기냐고 놀릴 뻔했다. 우리가 바라는 게 참 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간절히 원하지만 이 별것 아닌 걸 잘 못하고 산다. 나의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나를 별처럼 바라보아 줄 사람이 있는가? 힘들 때 안절부절 내 안색을 살피며 그 뻔하고 진부한 위로를 건넬 사람이 있는가? 아무리 밥 벌어먹고 사는 게 힘들고 그래서 내가 무가치하다고 느껴져도 이런 사람들이 곁에 있다면, 힘겹지만 내일 또 툭툭 털고 일어나 한동안 버텨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웃는 날도 있을 거고 살만하다 느끼는 날도 있겠지. 적어도 나는 세련된 정답보다 진실한 눈빛과 촌스러운 위로가 좋다.
전에는 그렇게 지루하던 드라마에 마음이 움직이는 걸 보니 나도 나이 드나 보다. 이러다가 곧 월요일 밤 11시에 '가요무대'를 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