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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투 Aug 20. 2021

옛날이 좋았다!

1999년 전 세계가 다가오는 밀레니엄으로 들떠 있을 때

남편과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가지고 있던 중고차를 팔아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당시 대학생이던 동생도 혹으로 달고서.


나와 연애를 시작하던 당시 남편은 유럽 배낭여행을 준비 중이었는데, 

연애를 시작하면서 차마 나를 두고 혼자 여행을 가지 못했다. 

그때 가지 못한 미련을 계속 가지고 있었는데 회사를 이직하면서 생긴 시간에 다녀오기로 했다.


워낙 배낭여행 열풍이 불던 때라 우리 말고도 많은 한국인 여행객이 있었다.

지금은 인터넷에 여행 정보가 선택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 

구글 지도를 비롯해서 숙소 예약 앱 등 편리한 게 많지만

그때만 해도 몇 권 안 되는 세계여행 책자와 지도가 전부였다.

물론 그 나름대로의 낭만이 있었다.

나는 지도를 잘 보고 길을 잘 찾아서 여행 때 그걸로 꽤 어깨가 으쓱했는데 

요즘은 내비게이션 덕에 그런 맛도 없어졌다ㅋ


그때도 여행책자의 소개만을 믿고 독일 코블렌츠의 에렌브라이트슈타인 요새를 찾아가고 있었다.

요새 내에 숙소가 있어서 색다른 경험을 원하는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다고 되어있었다.

그래도 가장 최신의 정보를 수록한 책이었는데,

그 요새를 코앞에 두고 전화를 했더니 이제 숙박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삐질삐질 식은땀이 흐른다. 손발이 떨려온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거리엔 사람도 없고 너무 난감하고 공포마저 밀려왔다.

컴컴하고 황량한 역 주변 길가엔 다니는 사람도 없고 쓰레기만 휑뎅그렁하게 굴러다녔다.

안내 책자를 들고 근처 숙박업소에도 전화를 해봤지만 왜 그날따라 빈방이 하나도 없는 것인지.

더 황당한 건 역 근처를 순찰하던 경찰들은 우리가 물어보려 다가가면 슬금슬금 도망을 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어떻게 한 명 붙들어 말을 붙였는데 영어를 못한다고 또 줄행랑친다.

전 세계 공용어 손짓 발짓이 있는데 겁먹기는...


공중전화 부스를 떠나지 못하고 전화통을 붙들고 쩔쩔매는 우리에게 지나가던 한 사람이 말을 걸어온다.

자기는 미국에서 독일로 출장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자기가 도와줄 게 있냐고 묻는다.

오~ 미쿡 사람 좋아요~

사정을 듣더니  직접 자기가 아는 곳에 여기저기 전화한다. 

그 사람도 별 수 없는지(없는 방을 만들어 낼 수는 없으니) 다른 곳은 포기하고

자기가 묵고 있는 숙소가 좀 비싸긴 한데 알아봐 줄지 물어본다.

뭘 물어 이 사람아~

전화를 걸어보더니 그 숙소도 여유는 없는지 남자는 다인실에서 다른 투숙객과 같이 자야 하고 

동생과 나만 2인 실을 줄 수 있는데 괜찮냐고 했다. 

괜찮냐고? 무슨 소리야 그 집 계단에서라도 재워만 준다면 거기까지 널 업고라도 가겠다!

숙박비도 협상해 준다.

잠만 자고 아침은 제공하지 않는 조건으로 아주 비싸지는 않은 가격이었다.


천만다행이다 생각하고 따라나섰는데, 그런데 그 남자를 따라가는 길이 너무 이상했다.

어두운 다리 밑을 지나 계속 산길 같은데로 올라가는데(정말 끝도 없이 올라갔다.)

무슨 길이 가로등도 거의 없고 건물의 윤각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깜깜했다. 

이상한 데로 끌려가는 건 아닌지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남편에게 쉴 새 없이 말을 거는 게, 정신없이 만들어 어디 차에 실어가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공포에 떨면서도 따라가는 수밖에...


도착한 곳은 다행히 이상한 곳은 아니고 일반 가정집 같았다.

일단 배정된 방은 좁았지만 깨끗하고 침대도 뽀송뽀송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바로 쓰러져  자고 다음날 아침 일어났는데...

대박!!!

집이 너~~무 훌륭하다. 

뷰가~ 뷰가~

입이 안 다물어진다.


어젯밤에는 늦은 시간이라 다른 사람들 깰까 봐 불도 못 켜고 

살금살금 들어와 잠만 잤기 때문에 집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충격이 가시기 전 머리가 눈처럼 하얀 할머니가 손에 뭐를 잔뜩 들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원래 아침을 안 주는데 아무래도 너희들 배가 너무 고플 것 같아서 장을 봐왔다며 

독일 가정식을 멋지게 차려주는 게 아닌가.


올라가는 길이 왜 그리 가파르고 깜깜했는지 알았는데

한국으로 치면 성북동 같은 부자 동네였다.

산비탈을 따라 올라가며 근사한 집들이 드문드문 한 채씩 있는, 가로등이 없을 만도 하다.

어젯밤의 공포와 떨림이 무색하게 절대 우리 수준에서 머물지 못할 좋은 숙소에서 

마음씨 좋은 독일 할머니의 따뜻한 아침상을 받고 떠났다.

미국인 아저씨는 아침 일찍 일 보러 나갔는지 떠날 때 만나진 못했다.


여행 일정 중 야간 기차를 타고 모나코(확실하진 않다, 이건 동생도 기억이 가물가물...)에 가고 있었는데

잠자기 전 이를 닦으러 화장실에 갔다.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 다른 칸으로 이동, 다행히 한가하다.

동생과 열심히 이 닦고 세수하고 있는데 밖에서 똑똑 거린다.

나도 여기 사람 있어요~ 란 표시로 똑똑 답했다.

그런데도 또 계속 두드리는 게 아닌가.

"왜 저래~ "하며 무시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유럽은 가보기 전까진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여행하다 보니 

생각보다 무례하고 수준 이하의 사람도 꽤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뭐라 뭐라 말소리도 들리고 전보다 더 세게 두드리는 게 아닌가

"아유 뭐야 안에 사람 안에 있다니까" 짜증을 내며 문을 확 열었는데, 

승무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이제 열차가 갈라지는데 너희는 어느 방향으로 가냐고 묻는다.

열차가 출발은 같이 했지만 중간 지점에서 객차가 두 방향으로 갈라지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가 탑승한 칸에 있었으면 목적지로 무사히 갔겠지만 이 닦느라 칸을 옮긴 게 문제였다.

이를 닦다 말고 정말 미친 듯이 달려서 우리 칸으로 돌아갔다.


식겁했다.

몇 분만 늦었으면 여권도 돈도 없이 칫솔 하나 달랑 들고 낯선 곳에 던져졌을 생각을 하니 

숨도 쉬어지지 않을 만큼 공포스러웠다.

평소 이를 열심히 관리해도 잘 썩는 편이라 양치질에 열심인데, 그 순간은 기차 칸 까지 옮겨가며 

이 닦는 내가 참 유난이다 싶어 한대 쥐어박고 싶었다.

그 승무원이 포기하지 않고 문이 부서 저라 두드려준 덕에  

코미디 같은 상황은 연출됐지만 무사히 목적지에 갈 수 있었다.

승무원 아저씨 감사합니다~~~


운이 좋은건지 여행 중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여정은 더 활기차고 풍요로워지고 

난처한 상황에서도 최악이 되기 전에 잘 빠져나 올 수 있었다. 오히려 얘기할 추억이 더 많아졌다.

그래서 어리바리한 사람도 어쩌어찌 남들 하는 거 다 하고 사나 보다.


나도 길에서 외국인이 지도만 들고 있어도 관심이 간다.

(요즘은 지도보단 거의 스마트폰을 들고 길을 찾지만)

내가 받은 친절을 그들에게 돌려주고 싶어 진다.

혹시 길을 헤매는 건 아닌지, 택시 타면 금방 가는데 몇 번씩 버스 타고 돌아가는 건 아닌지,

인터넷의 잘못된 정보를 보고 별것 아닌 곳을 맛집으로 알고 찾아가는 건 아닌지,

옆에 가서 오지랖을 부리고 싶어 진다.

너무 가깝지 않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시선은 자연스럽게 다른 곳을 향하지만 

귀를 토끼처럼 세우고 정신과 신경을 송곳처럼 날카롭게 집중해서 온 몸으로 관찰한다.

내가 끼어들만한 순간이...


어라? 

금방 잘 찾아 나만 남겨두고 그 자리를 떠난다.

에이, 오늘도 허탕이다.


나도 누군가의 외국 여행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에 짜잔~ 나타나 문제를 촤자작~ 해결해주는,

돌아가서도 오래오래 기억할 만한 친절한 한국인이 한 번 돼보고 싶은데

앱으로 나보다 더 서울 시내 길도, 맛집도 잘 찾는듯하다.


옛날이 좋았다!

요즘은 너무 스마트해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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