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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투 Jul 30. 2021

태도가 전부다.



둘째 유산 후에 몸이 많이 약해졌다. 그래서 아들 하나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타고난 몸도 약하다. 병원에 가면 의사가 "이분 공주시네~, 힘든 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엄쉬엄 편히 사세요. 가지고 태어난 몸이 약해요" 이런다. 젊어서는 젊음으로 커버할 수 있었지만 나이 드니 한두 군데씩 아픈 곳이 나타난다. 하지만 병원 다니며 치료받고 평상시에 무리하지 않으며 관리를 잘하면 되는 정도다. 다행히 큰 병으로 발전한 적은 없다.

아픈 내색도 잘 안 하고 성격이 밝아서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남들은 아픈 걸 전혀 모르고 설령 내가 몸이 약하고 아프다고 해도 평상시 밝은 모습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요즘 손목이 고장 났다. 워낙 여기저기 조금씩 삐거덕거리니 생활 속에서 조금 무리해서 생긴 증상은 잘 쉬고 스트레칭하고 찜질하면 낫는데 이번에 좀 오래간다. 염증인 것 같아 병원에 갔다. 이제 내가 염증 정도는 알아맞힌다. 역시 손목 힘줄에 염증이 생겨서 약 먹고 주사 맞고 물리치료받고 있다. 그날은 쉬는 날이라 더워지기 전에 아침 일찍 병원으로 나섰다. 물리치료까지 기분 좋게 받고(물리치료사가 너무 친절하다. 병원 후기를 읽어봐도 이 정형외과는 의사보다 물리치료사를 보고 사람들이 오는 듯하다.) 


처방전을 받으려는데,

"성함이?"

"김소영(가명)이요~"

"김소연(가명) 씨 처방전 나왔습니다."

"전 김소영인데요."

그때부터 접수처 직원과 병원 사무장처럼 보이는 남자가 우왕좌왕 네가 맞네, 내가 맞네 하면서 옥신각신하더니 간호사를 몇 번 핀잔준 후에야 내 처방전을 뽑아줬다.

"저 김소영으로 진료받은 거 맞아요?"

"맞아요"

남자가 귀찮은 듯 성의 없이 대답한다.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냄새가 나는데...


찜찜하지만 일단 약국에 갔다. 그런데 병원 옆 약국에서도 그 병원 사무장이 전화했는지 이미 통화를 하고 있다. 김소연 씨가 약국에 왔다 갔는지 확인하는 전화였고 약사는 자기네 약국엔 안 왔다고 한다. 여기서 더 불안해진다. 내 약이 전과 같은지 확인했고 약이 전과 달라졌단다. 하필 약까지 달라져서 더 의심스러울 수밖에.

'아... 불안한데' 내가 계속 의심스러워하니 약사가 다시 병원 가서 확실하게 확인하고 오란다. 병원 가서 다시 확인하니 내 처방전이 맞단다. 다시 약국으로 가니 또 통화 중이다.


"이미 다른 약국에서 약이 나갔는데 우리가 어떻게 다시 줘요"

"시스템상으로 불가능해요."

전화를 끊고

"이미 타간 약을 어떻게 그냥 주라는 거야"

약사도 어이없다는 듯 말한다.


병원에서 김소연 씨에게 내 처방전을 주었다. 그 사람은 아무 의심 없이 다른 약국에 가서 약을 받아갔다. 약국서도 김소영 씨를 불렀겠지만, 발음이 비슷하니 자기 이름으로 알아들었겠지. 내 처방전은 이미 발행됐으니 남아있는 김소연 씨 처방전을 나에게 주려 했는데 내가 아니라니 헤매다 내 처방전을 일단 다시 출력해 줬을 테고, 김소연 씨에게 약을 주지 말라고 약국에 전화했는데 그분이 다른 약국으로 가버린 것이지. 약사가 내 처방전을 등록하니 김소연 씨가 이미 다른 약국에서 내 이름으로 받아 갔기에 나는 약을 탈 수 없는 상황. 일이 복잡해질 것 같으니 사무장은 약국에 전화해 나에게 그냥 일단 약을 주라고 했다(통화 내용상 이건 불가능하고 불법인 것 같다). 약국에서 거절하니 결국 나에게 전화해 다른 사람이 내 처방전을 가지고 가, 이미 약을 받아 갔기에 오늘 두 번 약을 받을 수는 없단다. 그 사람에게 전화해서 다시 약을 가져오기로 했으니 나보고 오후에 다시 약국에 들러 약을 받아 가란다. 


몇 시쯤 다시 오면 되냐니까 그 사람이 언제 올지 모르니 오늘 오다가다 약국에 계속 들려보란다. 빡 돈다. 내가 그 동네를 하루 종일 오다가다 하는 사람도 아니고 뭐 이런 개 풀 뜯어먹는 소리가 있나. 병원 건물이 주차가 불편해 불법주차를 하던가 집에서 걸어가야 하는데 가깝지 않은 거리를 이 더운 날에 다시 올 생각을 하니 짜증이 났다. 아니 그보다는 그 사무장의 태도에 짜증이 났다. 보통의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환자분 죄송합니다. 저희 쪽의 실수로 처방전이 잘 못 나갔습니다. 이름이 비슷해서 직원이 헷갈렸네요. 김소연 씨와 통화해서 다시 약을 가지고 오시기로 했으니 일이 처리된 후 연락드리면 번거로우시겠지만 약국에 다시 들러주시겠습니까." 이렇게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사무장은 처음부터 전혀 미안하단 말도 없고, 미안한 기색도 없이 건들거리는 말투에 오히려 김소연 씨가 처방전을 잘못 가져갔다고 짜증을 내고 있었다. 김소연 씨야 주는 대로 가져갔을 뿐 자기네 실수를 환자한테 떠넘겨도 유분수지...


내가 아무리 화내지 않고 온유한 사람이 되고자 밤마다 회계하고 성숙한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이건 아니지! 김소연 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상황과 사과하지 않는 태도,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지 않고 무조건 약국에 들리라는 일 처리에 대해 따지자 그 사무장은 '옛다 사과' 하는 식으로 말끝을 얼버무려가며 억지로 사과 아닌 사과를 했다. 사과하는 태도가 기가 막혔지만, 약국 안에서 그 사람과 큰소리 내 싸우면 약국에 폐가 될 것 같고 또 난 큰소리 내면 심장이 벌렁거리는 새가슴이라 그만뒀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김소영, 김소연 얼마든지 헷갈릴 수 있다. 인정하고 사과하면 되는 일을 뒤에서 모르게 수습하려다 서로 기분이 다 상하고 편법을 쓰려다 약국에도 면이 안 서게 됐다. 나는 또 땡볕에 약국에 다시 가야 한다. 조그만 실수에도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환자들에게 데어서 처음부터 방어적이 됐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잘못은 잘못이다.


전에 이미지 메이킹 연구소에서 일한 적이 있다. 소장님은 주로 외부 강의나 VIP 개인 고객을 상대하고 연구소 내부는 내가 관리했는데 개인 이미지 메이킹을 받기 위해 오는 사람들을 응대하는 것도 내 일 중의 하나였다. 연구소 강사들 중 스피치를 담당하는 강사는 고객과의 약속을 수시로 자기 마음대로 바꿨다. 강사도 사람이라 사정이 있을 수 있으니 매번 간섭할 수는 없지만 저러다 컴플레인 한번 받겠다 싶었다. 그날도 고객과의 약속 시간에 많이 늦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전에 이미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미팅 시간을 바꾼 탓에 고객은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들어오자마자 "어머~ 고객님 죄송해요~ 얼마나 오래 기다리셨어요, 제가 이러이러한 사정이 있어가지고... 미주알고주알..." 흡사 똥파리를 연상시키듯 연신 손을 비벼가며 얼마나 열심히 사죄를 하는지... 그런데 고객이 여기서 진짜 화가 났다. 그녀의 과장된 사과에는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보여주기 식 사과에 고객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더는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없다며 돈을 환불해 줄 것을 요구했다. 나와 한참 얘기를 나눈 후에 마음이 좀 누그러들었지만 그 뒤에 환불을 했는지 계속 컨설팅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실수를 인정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나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고 싶은 적이 많다. 하지만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상대의 마음은 상할 대로 상하고 일은 더 복잡해지고 그 뒤로도 찝찝함이 계속 따라다닌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해줄 준비를 하고 있다. 어떨 땐 실수한 사람이 직장에서 난처해질까 봐 걱정도 해주고 윗사람에게 알려지지 않게 무마도 해준다. 무릎을 꿇을 것도, 90도로 머리를 숙일 것도 없다. 손이 발이 되게 빌 필요도 없다. 그저 실수를 인정하고 진심을 다해 사과하면 된다.


사과하지 않는 것도, 억지로 사과하는 태도도, 진심이 담기지 않은 과장된 사과도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미안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못 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풀릴 때도 있다. 진심의 힘은 대단하다. 가는 길이 없는데도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가서 닿으니 말이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태도가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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