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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천지 Oct 15. 2021

나는 개가 아니야, 냄새를 맡지 않았어

출근 후 루틴 중 하나가 텀블러 씻기다. 어제 사용한 물 컵 씻기는 숨 쉬는 것처럼 습관화된 행동이고 별스럽지도 않은 일이다.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근 후 탕비실에서 컵을 씻고 있었다. 그냥 고무장갑 끼고 벅벅. 근데 그 모습을 본 직원이 오,ㅇㅇ씨 설거지하는 모습 되게 여성스러운데, 달라 보여.라고 말했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개소리지 싶어 곱씹어 볼 겸 여기 쓰려고 한다.

이 사람은 왜 설거지하는 내 모습을 보고 여성스럽다고 표현했을까. 상황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한 거였을까. 내가 쓴 물컵 내가 씻은 거고, 타인이 쓴 물컵 타인이 씻을 텐데 그럼 그 모습을 보고 성을 나눠서 여성스럽다, 남성스럽다고 표현할 건가.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그냥 아무 의도, 의미 없이 말한 건데 내가 예민해서 이분법적이고 성차별적인 발언으로 받아들이는 건가.

비단 이런 예뿐만 아니라, 성희롱, 험담, 타인에 대한 비하, 외모 평가 등등 신경 쓰이는 단어들과 구닥다리 사고방식들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종종 일어난다. 아닌 걸 아니라고 바로잡고 말하는 순간도 있지만 사실 거의 모든 순간들은 스리슬쩍 외면해버리고 만다. 내가 거기서 아니라고 해봤자, 저 사람들은 날 이상하게 보거나 '너,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그 정도 농담도 못하니?', 'ㅇㅇ씨, 이런 게 사회생활이야. 아직 어려서 모르는 거야.'라고 나를 나무라겠지. 그러면 또 나 혼자 분노하고 삭히기를 반복하겠지.

나도 얼토당토않은 말에 윤여정 배우님처럼 멋있게 받아치는 말맛을 가지고 싶다!!!!!!!!!!!!!!!!!!!!!!!!!!!!!!!!!!!!!!!!!!!!!!!!!!!!!!!!!!

'나는 개가 아니야, 냄새를 맡지 않았어.' 같은 우아하면서 상대에게 빅엿을 먹일 수 있는 그런 말발 말이야.

나는 계속 이런 불편한 상황들이 생기는 상황 속에서 살아갈 것이고, 양은 냄비처럼 쉽게 끓어올랐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식어가겠지.

그래도 '아, 이건 정말 아니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에는 빨간 르크루제 냄비 속에서 서서히 열이 올라 펄펄 끓는 토마토 고기찜처럼 이상하고 다르지만 이상함을 의식하지 못하게 그렇게 조금씩 다른 내 의견들을 피력해 좀 더 나은 사회인이 되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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