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레오 타입은 지겨워
운전을 좋아하는 여자 요리를 좋아하는 남자
나는 운전을 좋아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면허를 먼저 땄으니 말 다했다. 물론 운전을 엄청 잘한다는 건 아니고 그냥 내가 운전하는 것이 몸과 마음이 편하달까? 특히 피곤한 날은 멀미가 심해서 잠깐의 택시 탑승으로도 울면서 내리곤 했다. 자동차 회사에 36년을 근무하신 아빠 덕에 어릴 때부터 자동차에 자연스러운 애착이 있었다. 내 차를 꼭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입사해서 처음 적금이 만료되었을 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계약했다. 차에 이름을 붙여주고 매일매일 차에 말을 걸며 행복해하며 운전하고는 했다. 가끔 답답할 때는 드라이브를 나가고 친구들을 태워주는 것도 좋아해서 여행 중에는 운전기사를 자처한다.
이런 나와는 정 반대의 남편. 남편 또한 면허는 있다. 그러나 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오너드라이버가 된 것과 달리 남편은 항상 회사 옆에 살았기 때문일까? 차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장롱면허! 보통 남자들이 돈을 벌면 차를 사고 싶어 한다는데... 이 남자는 지하철과 고속버스를 잘만 타고 나를 만나러 왔다. 그렇게 우리 사이의 운전은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되었다.
원래 나는 요리도 참 좋아한다. 먹는 것을 좋아하고 먹이는 것을 좋아해서 친구들에게도 요리를 많이 해주었고 특히 나의 주 고객은 내 여동생. 나와는 완전 다르게 빼빼 마른 동생은 먹고 싶은 것도 잘 없어서 끼니를 쉽게 거르는데 나는 그것이 너무 안타까운 것이다. 그래서 동생이 고등학생 때는 도시락을 싸주기도 했었다. 여하튼 요리는 나의 분야였는데,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나에게 맛있는 것을 해주고 싶다고
주말부부인 덕에 항상 오랜만에 보는 내게 맛있는 것을 해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남편의 요리는 어느 순간 본격적이 되어서 함께 준비하던 식사는 어느새 남편 몫이 되어버렸다. 나는 남편집에 가기 며칠 전에 먹고 싶은 것을 꼭 생각해가야 하는데 이것은 남편이 내게 준 숙제다. 내가 어떤 메뉴를 하나 요청하면 남편은 그 메뉴와 적당히 어울리게 주말 동안의 식단을 짠다. 남편의 주특기는 소고기 미역국과 티본스테이크 지만 장르를 가리지 않고 도전하는 편이다. 유튜브에 많은 요리 스승을 둔 남편은 명불허전, 이제 우리 가정의 솊이다.
보통 요리는 여자가 운전은 남자가 한다는 티피컬 타입이 있다. 건축 같은 거친 일은 남자가 섬세한 일은 여자가 한다는 편견도 있다. 이런 고정된 성역할들을 본의 아니게 깨부수며 살아가다 보니 피곤한 일이 많다. 성격이 드세다는 뒷말을 듣고 혼자 눈물을 훔치기도 했고 남자 기를 누르는 피곤한 타입이라는 평가를 받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나도 이렇게 찰떡같이 남편과 잘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은 결국 다 다르기에 서로 맞추어 살면 그뿐인 것 같다. 가끔 욕도 하고 욱하기도 하는 나와 달리 항상 정제된 말을 쓰는 남편은 꼭 우리 엄마 같다. 그런 모습 때문에 내가 이 사람과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볼 수 있었다. 부족함이 많은 우리이고 유난한 점이 많은 나이지만 이렇게 어떻게든 살아지지 않을까?
사람들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좋게 좋게 말하는 법도 꽤 늘었다. 예전 같았으면 진지하게 성차별을 논하면서 분노했을 일들을 조용히 분위기를 깨지 않으면서 일침 하는 방법도 알게 됐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주변을 설득하는 방법을 익혀가는 것이 결국 어른이 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가 운전하든 누가 밥을 하든 아무것도 안 떨어지고요 아무도 기 눌 리지 않습니다. 우리 가정은 암탉이 시끄럽게 울지만 잘 굴러가고 있어요. 여러분의 가정도 평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