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적은 없다는데 살짝 몸 일으키기도 어려웠나 봐. 내가 들어오자마자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 하시더라고. 그런 말 하는 분 아니잖아. 겁에 질려 있는 엄마 얼굴 보고 그냥 주저앉아 엉엉 울었어. 너무 속상하고 힘들어서.”
우리 식구에게 2021년은 시련의 해였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아버지로 인해 새해부터 넋을 놓은 상황이었다. 동생의 전화를 받은 건 어렵게 재활병원을 찾아 전원을 마치고 당진에 돌아온 직후.
‘왜 하필 지금···’ 첫 번째로 든 생각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동생도 나도 전쟁 같은 날들을 보냈다. 늘 건강했던 아버지였기에 치료방향 결정도, 간병도, 다음 병원을 찾는 것도 모두 해본 적 없는 힘겨운 경험이었다. 그렇다고 월급쟁이가 일터를 소홀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긴장과 염려로 채워진 3주가 간신히 마무리되고 있는 상황에 시작된 엄마의 통증 소식에 한숨이 먼저 삐져나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당시를 생각하면 동생이 보고 울 수밖에 없었다는 엄마의 표정이 떠오른다. 갑자기 쓰러져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심각하고 지친 얼굴로 들락날락하는 딸들. 어느 날부터 쑤셔오는 허리. 허리가 아프다더니 머리가 문제라던 아버지가 떠올라 더 두려웠을 것이다. 피곤에 지친 딸에게 당신의 고통을 알리기는 또 얼마나 마음이 볶였을까. 그런 심정이 가득 담겨 있었을 엄마의 표정. 그날의 동생처럼 나도 엉엉 울고 싶어 진다.
아픈 것도 눈치 봐야 하는 엄마. 엄마의 통증은 왜 하필 이런 식인지.
엄마의 고향은 이북이다. 정확히 말하면 중국 북경에서 태어나 몇 년 있다 평양에 자리 잡았는데, 여러 칸의 방을 지닌 큰 기와집이었단다. 당시 보기 드문 인텔리였던 할아버지는 학자이자 사업가로도 꽤 성공한 분이어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한국전쟁으로 한순간에 모든 걸 잃었다. 납북된 할아버지, 가장이 됐지만 여전히 ‘마나님’인 할머니, 자신만 중요했던 언니, 오빠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봐야 했던 밀양 박 씨 집안의 셋째. 내가 들었던 십 대 시절 엄마의 모습이다.
그래서일까.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단단함 그 자체였다. 교사인 아버지 박봉만으로 자식 셋을 기르는 게 쉬울 리 없었다. 그럼에도 직접 뜬 뜨개 옷, 손수 끓여 만든 딸기 잼, 어릴 적 먹었던 기억을 떠올려 만들었다는 다진 새우 살을 넣은 식빵 튀김 (이것이 멘보샤임을 최근에야 알았다.) 등 당신이 손수 만들고 해 입힌 것들에 대한 추억이 가득하다. 사촌언니는 “도넛이나 튀김을 자주 맛볼 수 있는 고소함이 가득했던 집”이었다고 기억한다.
체육교사인 아버지를 제치고 언니도, 나도 두 발 자전거를 엄마에게 배웠다. 갓난아기인 동생을 둘러업고 자전거 뒤를 잡아주며 “엄마 뒤에 있어, 걱정 말고 밟아!”를 외치던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다. 남의 자식도 버젓이 혼내던 시절, 내게 윽박지르던 덩치 큰 아줌마 앞에 바람처럼 나타나 “누가 내 새끼한테 고함질이야!” 삿대질하며 당당히 따지던 엄마는 마치 전사 같았다. 아파하거나 우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대학 가지 않겠다고 버티던 내게 배움에 한이 맺힌 당신의 과거를 말하며 보였던 눈물이 최초라고 기억한다. 강하고 단단한 박 여사. 십 대의 내가 기억하는 엄마이다.
대학은 물론이고 고등학교 졸업도 쉽지 않던 시대에 엄마는 명문 이화여고를 나왔다. 시험으로 학교를 들어가던 시절 상위 1, 2위를 다투던 여고였단다. 그때의 동문들과 지금까지 동창회를 이어올 정도로 엄마의 자긍심은 대단했다. 학업은 물론 미술에도 뛰어난 소질을 보였지만 대학은 허락되지 않았다. 장남, 장녀 대학 보내기만도 벅찼기 때문이었다. 담임교사까지 와서 할머니를 설득했지만 결국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 소망을 뒤로한 채 동생들을 돌봐야 했던 사춘기 소녀의 심정이 어땠을까.
이루지 못한 재능임에도 실력은 지금까지 녹슬지 않았다. 지난해부터 다니기 시작한 주간보호센터에서 엄마의 시화는 늘 전시되는 단골 메뉴이다. 또한 센터에서 가끔 보내주는 글은 '이런 마음을 표현 못 하고 답답해서 어떻게 사셨을까?' 싶을 정도로 멋진 작품일 때가 많다.
배움을 채우지 못한 엄마의 아쉬움은 우리에겐 회초리로 작용했다. 초등학교 시절 언니와 나의 최대 잘못은 시험에서 틀리는 것이었다. 틀린 개수만큼 매를 맞았다.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는 언니는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 새벽잠을 포기해야 했다. 곁가지인 나는 잠 깨라고 내보내면 계단에 앉아 졸기 일쑤였고 아무리 맞아도 나아지지 않는 실력이라 다행히 관심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엄마의 희망을 짊어져야 했던 언니는 중압감을, 나는 반항심을 품고 살았다. 들키지 않은 마음인 줄 알았는데 엄마는 다 알고도 표를 안 냈다.
머리도, 소질도, 생김새도 (결혼식 사진을 미용실서 달라고 졸랐을 만큼 젊은 시절 엄마의 미모는 남다르다.) 닮은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참기를 잘하고 감정기복이 적은 내 성정만큼은 엄마에게서 온 듯하다.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나이가 되면서 엄마의 삶이 다시 보였다. 부모와 사회의 그늘 속에서 바라보던 세상을 내 발로 서다 보니 만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세상은 법과 원칙이 당연한 곳도, 권선징악과 사필귀정이 이뤄지는 곳도 아니었다. 당연한 듯 한쪽의 희생을 요구했고, 악다구니를 쓰지 않으면 내 것을 지키기 어려웠다. 가족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힘의 불균형 속에서 양보하는 사람은 늘 정해져 있었다.
머리 굵은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참는 사람’이었다. 한 치의 주저함 없이, 조금의 서운함도 내비치지 않은 채 달라면 주고, 뺏으면 빼앗기는 사람. 그럼에도 생색을 내거나, 어려움을 호소할 줄 모르는 사람. 티를 내지 않으니 감사함은 생략되기 일쑤였고 그래서 한없이 애달팠던 사람이기도 했다.
엄마의 봄날은 언제였을까.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엄마의 삶에는 늘 가족이 '매달려' 있었다. 때로는 할머니와 당신의 형제자매가, 어느 날엔 나와 동생이, 또 어느 순간엔 언니가, 아버지가. 함께 있다기보다는 나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엄마를 향해 기울어져 있는 느낌이랄까.
온전히 엄마가 원하고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젊은 날 협력이 절실했던 순간에 외면당한 상처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의지였을까. 늘 자신을 뒷자리에 배치했고 당연한 듯 몸과 마음을 기댔던 날들이었으니 엄마의 봄날에 내가 등장할 것 같지는 않다.
재주 많고 꿈도 뚜렷했던 박 씨 집안 셋째 딸이 희망사항을 거둔 뒤 살아온 힘이 가족이었음을 알기에 한없이 엄마에게 미안해진다. 당신을 강한 사람, 참는 사람으로만 여긴 딸이라서. 엄마의 봄날을 뒤늦게 궁금해만 하는 못난 딸이라서.
엄마의 봄날을, 빛나고 화창했던 순간을 들어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화사함으로 가득했던 나날이 엄마의 기억에 선명하기를, 그래서 그때를 되새기는 얼굴이 행복으로 가득하기를 기도한다. 더하여 막대처럼 뻣뻣한 딸이지만 그런 엄마를 있는 힘껏 안아줄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