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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투덜이 Apr 07. 2023

병실에서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

 효자가 아니어야 긴 병을 이긴다

 저녁 7시, 어김없이 핸드폰이 울린다.

“밥 먹었냐?”로 시작해서 “나는 밥 먹었고, 방금 침대에 누웠다. 조금 있다 자야지.”로 끝나는 아버지와의 통화는 2년 넘게 이어지는 일상이다. 1분 내로 끝나는 날은 아버지가 무탈하게 하루를 보낸 날이라고 해석한다. 엄마와 동생은 대여섯 번의 통화에 시달린 날일지라도.

    

 아버지는 2021년 설 연휴를 앞두고 뇌경색, 즉 중풍으로 쓰러졌다. 대부분 뇌 한쪽이 막혀 편마비 증상이 온다는데 아버지는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해 풍이라는 짐작을 전혀 못했다. 허리를 다친 줄만 알았다 뒤늦게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향했다. 코로나가 엄중했던 시국에 고열 증세를 보인 아버지는 달랑 뇌 시티 한 장 찍고서 나와 함께 1인실에 격리됐다.      


 음성 판정을 받기 전까지 아버지는 환자도 무엇도 아니었다. 밥 먹다 황망히 달려와 병실에 갇힌 우리는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다. 주섬주섬 챙겨 오기는 했지만 정작 필요한 건 하나도 없었다. 수액을 맞던 아버지는 계속 환자복에 실례했고, “추워.”를 연발하는데 들고 온 담요는 턱없이 얇았다.  

    

 그 상황에 아버지는 직접 화장실에 가겠다며 있는 대로 고집을 부렸다. 178센티미터 넘는 양반이 힘쓸 때마다 굴러 떨어질까 진땀을 흘린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덜덜 떨며 연신 혼잣말을 하는 모습에 미친 듯 비상벨을 눌러댔지만 의사는 고사하고 간호사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그날은 오롯이 나만 아버지의 수호자였다. 지켜만 보다 놓칠 것 같아 공포와 무력감이 가득했던 수호자.     


 살려만 달라고, 이렇게 아무것도 못한 채 가족들과 헤어지게 하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그 기도가 통했는지 다행히 아버지는 조금씩 회복되었고 3년째 병원에서 생활 중이다.  

    

 체육교사 출신인 아버지는 당시 86세의 고령에도 종합병원 한 번 가본 적 없는 분이었다. 남들처럼 말이 어눌해지거나 신체 한쪽이 마비되는 증세를 겪지 않은 아버지는 조금씩 걷게 되자 완치를 자신했고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안다.”며 자가 진단과 처치를 시작했다.

     

 첫째, 기저귀 사용을 중단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마자 왕복 20분 이상 소요되는 화장실 행을 고집하여 간병을 맡은 세 자식은 시도 때도 휠체어를 밀어야 했다. 오가며 소란도 적지 않아 다른 환자들에게 방해되니 잘 때만 기저귀를 이용하자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변비라도 생기면 득달같이 전화해 집에서 복용하던 차를 가져오라며 호통을 쳤다. 당장 가져오지 않으면 퇴원하겠다는 협박과 함께. 나는 주치의에게 민간요법의 위험성을 꼭 집어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이게 다 병원 약 쓰라는 상술이라며 못마땅해하는 아버지를 전문성으로 간신히 ‘진압’했다.

    

 재활치료 연장. 아버지가 단행한 두 번째 조치였다. 조기퇴원을 목표로 다양한 처치를 밀어붙였다. “오늘부터 000에게 치료 더 받기로 했다. 그 이가 제일이야.” 아버지는 전화로 한 달에 백만 원이 넘는 비급여 치료를 통보했고, 가정의 달 5월은 집에서 맞겠노라 선언했다.  

    

 이번에는 직접 담판했다. 주치의의 소견을 전하며 최소 6개월의 병원 치료를 설득했고, 병원비가 만만치 않으니 치료방법은 재정 관리하는 나와의 상의가 먼저임을 말했다.   

  

 아버지의 서운함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나 역시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살려만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돈타령이라니. 자식 앞에서 지키고픈 자존감, 한 발이라도 더 걷고 싶은 간절함을 알면서도 기저귀 안 써서 힘들다고 투덜대는 스스로가 신물 났다. 간병을 함께 한 동생도 비슷했을 것이다. 우리는 차마 고충을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서로의 깊은 한숨을 이해했다.

     

 담판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반년이 지난 후 퇴원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살려만’에서 ‘걷게만’으로 변경된 소원까지 이뤄졌지만, 부축 없이 걷기 힘든 데다 인지장애까지 시작된 상태는 그것대로 걱정거리였다. 차라리 아버지가 누워있으면 이런 고민이 없겠다는 벼락 맞을 생각마저 들었다.     


 나의 간절함은 이렇게 이기적이다.      


 ‘퇴원하고 재발되면? 나는 당진에 있고 동생은 하물며 투잡인데 집에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허리 골절 시술받은 엄마는 또 어쩌고.’ 이런 고민이 우선인 척했지만 천만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 그게 핵심이었다.

    

 이제 집에 모셔도 되지 않겠냐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메뉴는 다양했다. 아버지의 호전 정도, 못지않은 어머니의 상태, 더우면 더워서, 추우면 추운 게 문제라고 주장했다. 장애등급 판정이나 장기요양 심사도 이유가 됐다. 코로나 시국 탓은 단골로 등장했다. 당연히 핑계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한 나와 동생의 고달픔을 제외한 채 설득하는 과정은 결국 언성을 높인 채 ‘통보’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아버지를 희망 고문하고 있다는 죄책감, 일주일에 한 번씩 당진에서 서울 병원을 오가며 살핀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서운함이 반복되며 영육의 진이 다 빠진 느낌이었다. 살면 얼마나 사시겠냐고 말하는 이들에게 직접 해보라며 날 세우기조차 지겨워질 무렵, 바닥을 쳤다.  

    

 그래, 나는 힘들었다. 2년간 아버지를 중심으로 내 세상을 돌렸고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대도 힘들었다. 핸드폰 화면에 병원 이름이 뜨는 순간, 내 시간은 중지됐다. 당일치기로 당진과 서울을 오가며 약을 날랐고, 전화 목소리에 따라 나는 아버지의 부모도, 상담사도, 운전기사도, 해결사도 돼야 했다. 술도 안 먹고 겪은 블랙아웃, 피곤에 지쳐 돌아오다 겪었던 역주행의 아찔함마저 2순위로 여기고 살았던 내가 아닌가.

     

 나는 나를 구하기 위해 죄책감으로 외면했던 수고를 인정하고 다독였다. ‘유병장수’ 중인 부모와 긴 호흡으로 함께 하기 위한 태세 전환이 필요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자식의 도리’를 하자. 긴 병에 효자 없다는데 효자가 아니라면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방점을 ‘부모의 바람’에서 ‘나의 형편’으로 이동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동 중이다.

      

 올해 2월, 아버지는 재활병원 입원기간이 끝나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작년 여름 추가 발병으로 상태가 나빠져 퇴원을 꿈꾸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역시 포기를 몰랐다. ‘집으로’를 요청하는 전화가 울렸다. 완치는 물 건너갔지만 그렇기에 병원에서 해줄 게 없다는, 지극히 타당한 주장이었다.    

 

 “3년째 입원이니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 충분히 이해돼요. 하지만 직장에 다니는 저와 동생이 늘 살펴야 하는 아버지를 집에서 모시기는 힘들어요. 어머니도 살펴야 하는 상황이라 더욱 그래요. 휴직도 생각했지만 솔직히 두 분을 원망하게 될 것 같아요. 소원을 이뤄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아버지.”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말했다.  

    

 전화기 넘어 침묵이 흘렀다.

    

 “알았다.”   

  

 자식이 힘들면 할 수 없는 일임을 아버지가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마음 가득 죄송했지만,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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