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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투덜이 Jul 27. 2023

‘얼굴만 중견’인 초임교사였습니다

- 살아남은 늦깎이 교사의 20년 교직 이야기

 “학생들을 가르치겠다고? 그것도 초등학생을?”(이후 침묵)

“편입 진짜 쉽지 않다는데 애썼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2002년, 교대 편입생으로 변신을 알렸을 때 지인들의 반응은 엇비슷했다. 30대 중반 미혼 여성의 눈물겨운 자립 노력을 대견해하면서도 초등교사가 된 나를 미리부터 낯설어했다. 축하해 주었지만 끝말이 흐려지기 일쑤였다.

그런 그들이 하나도 섭섭하지 않았다. 나 역시 새내기 초등교사가 된 내 모습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으므로.     


 누가 봐도 나는 ‘노는 물이 어른’인 사람이었다. 감성 깃든 말을 간지러워하고 설명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생각에서 결정까지의 구간이 짧아 굼뜬 사람이 버거웠다. 외로워도 슬퍼도 우는 법을 몰랐고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을 약하다 여겼다. 시니컬한 농담을 지적이라 여기는 허세까지 장착하여 지인들의 마음을 다치게 했고 사과 역시 기승전결이 확실하여 듣는 사람의 기분을 더 서늘하게 하는, 냉기가 줄줄 흐르는 사람이었다.      


 신체적으로 활동성이 강하고 주의집중 시간이 짧다. 쓰기보다 그리기, 놀이하기,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 구체적 조작이나 감각적 경험이 중요한 시기이다. 감정 표현이 강렬하며 자주 변한다. 감정조절을 못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다.      


  2023년 대구시교육청이 발간한 가이드북에 기재된 초등 저학년 발달특성이다. 한눈에 봐도 나와는 극과 극. 지인들이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내 학급 학생들을 안쓰러워할 이유는 충분했다.

     

 뿐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교사가 되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나였다. (살면서 “절대 안 해”라는 말은 ‘절대’ 하면 안 된다.) 중학교 체육교사였던 아버지의 세상은 전혀 매력이 없었다. 얇디얇은 월급봉투, 권위와 순종이 강요되는 현장, 문제가 생기면 온전히 교사의 책임인 비정한 일터. 내 눈에 비친 학교는 그런 곳이었다.

그 낡고 답답한 세계에 몸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대학 안 가겠다 버티던 딸 대신 사범대학에 원서를 넣었던 부모님이다. 돌고 돌아 연고 하나 없는 충남에서 늦깎이 초등교사가 된 나를 보던 두 분의 표정. 요즘말로 할많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으로 느껴졌던 건 내 자격지심이겠지?     


 첫 발령지는 천안. 개교한 지 6개월 된 신설학교였다. 새내기 교사가 3명 배정됐는데 누가 봐도 중견교사 같은 나 때문에 관리자들은 몇 번이고 임명장을 다시 봤다고 한다. 그러더니 ‘나이만 많은’ 나를 6학년에 배정했다.

20년 전에도 신규교사에 대한 보호자들 의심의 벽은 높았다. 지금처럼 툭하면 자격 운운 하는 몰상식이 대세는 아니었지만 초보운전 딱지 붙인 차 취급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게다가 신도시에 위치하여 목소리 큰 보호자가 많은 학구였다. 그래서 신규 같지 않은 신규인 나를 최고학년에 밀어 넣었나 보다. 총 6개 반, 나이는 서열 3위인데 경력은 가장 막내였다.      


 학생들은 예상보다 많이 쏟아졌고 개교를 서두른 탓에 모든 시설이 부족했다. 개학 전날, 교실은 칠판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날이 개학인데 책상이 그날 밤 들어온다 했다. 컴퓨터는 일주일을 기다렸고 TV는 14일 뒤, 고작 38인치 모니터로 설치됐다. 대형 TV가 구비된 다른 반과 달리 우리 반은 한 학기 내내 그 녀석으로 버텼다. 요즘은 가정집 거실도 70인치를 놓고 본다. 교실 중간 이후부터는 화면이 눈에 들어오기나 했을까 싶다.

지금이라면 빗발치는 민원에 쑥대밭이 되었을 텐데 용케 한 학기를 무사히 넘겼다.     


 20년 전이지만 컴퓨터가 익숙해진 현장에서 맨손으로 41명 학생을 가르쳐야 했던 ‘얼굴만 경력교사’ 심정이 짐작 가시는지. 실력도 경험도 없는데 기자재까지 없으니 곰 손으로 자료를 만드느라 날마다 밤을 새웠다. 횡격막의 오르내림을 알려주기 위해 페트병에 고무장갑을 잘라 붙이고, 역사 연대표를 전지에 쓰느라 끙끙댔다. 주머니 탈탈 털어 디지털카메라를 장만하여 첨단 장비(?) 없는 소외감을 달랬다.

이런 고민은 오로지 나만의 몫이었다. 컴퓨터도 TV도 경력도 있는 선생님들은 어찌나 여유 있던지. 신규 주제에 매주 있는 배구 모임을 빠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장에 구두 신은 채 운동장에 나가 즐거운 듯 배구공을 올려야 했다. 다음날 수업 준비로 초조해하면 선생님들은 “교과서대로 하면 돼요.”라며 웃어넘겼다. 할많하않, 나도 따라 웃을 밖에.     


 뿐인가, 세 들었던 아파트 부도로 집을 빼지 못해 운전조차 초보면서 공주에서 천안을 날마다 오갔다. 하루하루가 엎친 데 덮쳤다고 느꼈던 나날들이다. 여기에 자빠지기까지 한 일이 벌어졌다. 집에서 컴퓨터로 열심히 자료를 만들고 있는데 번개가 번쩍, 천둥이 우르릉 쾅! 애써 만든 파일이 사라진 게 아닌가.   

   

 ‘내일 학교 안 가면 세상이 무너질까?’ 망연자실할 힘도 없었다.     


 새내기가 왜 새내기일까. 플랜 B 따윈 없는, 위기상황에 놓이면 한없이 마음이 쪼그라질 수밖에 없는 여린 새싹이다. 사회 초년생이 아니었음에도 내 마음속 세상은 무너져 내렸다. 고작 수업 준비 하나 못했을 뿐인데, 기자재만 없을 뿐인데 학교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준비되지 않은 내 모습을 드러낸다는 생각만으로도 머리털이 곤두섰다. 나 혼자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더욱 외롭고 막막했다.       


 그날 밤은 길고 길었다.     


 무너지지 않는 건 알았지만 학교에 안 갈 배짱은 없었다. 내 낯빛이 그리도 달랐을까. 동 학년 선생님이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주었다. 내 사정을 듣더니 아무 말 없이 학생들을 우리 반으로 데리고 와 교실을 바꿔 수업하자 했다. 어리둥절한 내게 자기 반 컴퓨터에 자료가 있으니 참고해서 수업하면 될 거라며. 다른 반 선생님들도 화들짝 놀라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주었다. 알아서 살폈어야 하는데 무심해서 미안했다고 나를 다독였다.     

 ‘오늘부터 1일’, 그렇게 마음으로 교사가 되었다.  


  “엄마가 어느 학교에서 전근 오셨는지 물어보래요.” “선생님, 결혼하셨어요?”

심심찮게 학생들이 질문한 걸 보면 외모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어설픔이었나 보다. 그럼에도 득달같이 찾아와 삿대질하거나 수십 통씩 전화 걸어 무능을 탓하는 보호자는 없었다. 신설학교 특유의 혼란스러운 학급 환경을 관리자에게 항의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교사인 내게 책임을 묻는 사람 역시 없었다.

‘기분이 태도가 되면 안 된다’는 상식이 통했던 끝자락에 교직에 입문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다툼이 생기면 일단 혼부터 내고 전후 사정을 따졌던, 지금이라면 꼼짝없이 아동학대 교사였을 나의 미숙함을 알면서도 학생들을 향한 노력을, 정성을 더 믿어주었다. 기다려주었다.

그런 믿음과 소통을 토대로 6학년 6반 학생이, 6학년 6반 교사가 되었다. ‘우리’가 되었다.     


 생애 처음 맡았던 학생들(요즘은 빈말로라도 제자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2학기가 끝나는 날, 내겐 소멸된 줄 알았던 눈물을 펑펑 쏟으며 졸업장을 전달했다. 수고하셨다며 울먹이는 학생의 엄마와 헤어지는 연인인 듯 끌어안고 서로의 등을 두드렸다.

그들에게 나는 어떤 선생이었을까. 서울로 파견 간 나를 찾아오고, 동창회 할 때마다 끼워준 걸 보면 졸업하자마자 지워버리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 다행이다.     


 그로부터 20년, ‘나무 말고 숲을 보라’며 거시적 안목을 강조하던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과제를 점검하고 “할 일 안 하고 나가 놀면 두 배.”를 외치는 쪼잔 복수의 달인이 되었다. 부러지지만 않으면 괜찮은 거라 여기며 살았는데 종이에 베였다고 달려오는 아이들에게 “에구구, 어쩌다 이랬어.” 호들갑 떨며 소독약과 반창고를 처방하는 내공을 획득했다.(저학년은 반응과 조치가 중요하다. 뭐라도 발라주어야 끝난다.)

“모든 걸 울어서 해결하지 말고 말로 하라”고 쌀쌀맞게 말하던 나이만 먹은 철부지는 “진정될 때까지 몇 분 필요해?”라는 중간단계를 거쳐 “언제든지 들어줄게. 일단 마음 가라앉혀보자”라고 진심으로 말할 줄 아는 선생이 되었다.

과거의 내가 보면 “누구세요?”할 정도로 변신했고, 성장했다.     


 교사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초, 중, 고등학교에서 일정한 자격을 가지고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 첫 번째 교사(敎師)이고 ‘각종 직업 훈련 기관에서 직업 훈련을 시키는 사람’ 역시 교사라 하는데 선비 사(士)를 쓰는 점이 다르다.      

 

 굳이 이 둘을 구분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요즘 학교 현장에서는 어이없는 일이 많이 벌어진다. 보육을 원하는지, 교육을 원하는지 구분이 안 가고 ‘매 맞는 아이’가 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낼 때도 적지 않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묻고 싶어질 만큼 무력감이 든다.     


 그럼에도 나는 ‘일정한 자격’이 꼭 필요한 직업이 교사라 믿는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지식을 포함한 많은 것이 오가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데 필요한 자격. 이 자격은 교사만의 노력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이뤄질 수가 없다.

현장에 걸맞은 능력과 특성을 기르는 것이 교사 본인의 과제라면 보호자와 학생은 이런 교사의 노력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동료교사의 따뜻한 격려도 필요하고 현장의 울타리로서 관리자와 교육 당국의 역할도 크다.     


 돌이켜보면 위기의 순간도 적지 않았다. 때로는 동료교사 찬스로, 보호자와 학생들의 지지로, 더디지만 놓지 않았던 스스로의 노력으로 용케 넘겼다. 전생에 나라를 구해야 만날 수 있다는 울타리가 되어주는 관리자도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게 나는 교사가 되었다. 교사로 ‘살아남았다.’

교사가 되어 행복한 날들이 많았는데 오늘은 서글프다. 살아남은 교사라서. 격려가 필요했던 누군가의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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