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면 당연한, 그럼에도 몰랐던 빛나는 존재들
아버지가 야구선수 출신 체육교사였음에도 운동 DNA를 장착하지 못한 나는 살기 위한 최소한의 움직임만 하고 산다. 다행이라면 최근 몇 년 사이 걷기 습관이 생겼다는 것인데, 바깥 풍경 보며 걷는 재미를 알아버린 게 문제다. 속도나 자세와 상관없이 그저 무턱대고 걷고만 있으니 운동 아닌 산책이라 해도 딱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나에게 퇴근 후 걷기는 오감을 일깨우는 복합 운동. 그날그날 다른 공기의 내음, 운동화 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땅의 감촉, 같은 장소라도 계절과 시간에 따라 다른 느낌의 풍경들, 좋아하는 음악까지 한 숟가락 얹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종합선물이다.
특히 해가 저물고 조금씩 어둑해지며 밤하늘에 별(엄밀히 말하면 항성과 행성)들이 하나둘 등장하는 그 순간을 좋아한다. 4년 전, 오봉천변을 걷다 무심코 쳐다본 하늘에 얼마나 많은 별이 박혀 있던지 깜짝 놀랐더랬다. 주변이 대부분 논밭이라 달과 별이 제 빛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겠지. 당진 시내로 이사 온 뒤 그만큼의 별은 만나지 못해 아쉽지만, 대도시에 비하면 그나마 수월하게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처음에는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들을 감탄하기만도 바빴지만 시간이 지나고 곧 한 개의 천체에 관심이 갔다. 금성인 줄 알았다. 그만큼 엄청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와 떨어진 곳에 더욱 반짝이는 녀석이 있었으니 샛별은 아닌 게 확실했다. 인공위성인가 여기며 별자리 어플을 통해 확인한 순간, 어라? 목성이란다.
믿을 수가 없었다. 목성이 눈으로 보인다고? 저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몰랐다고? 행여나 틀렸을까 다른 별자리 앱으로 재차 확인까지 마친 후 혼자 흥분해서 펄쩍거렸다. 미지의 성체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인 양 신이 났다.
과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뭐 그리 놀랄 일일까. 태양계에서 제일 크고 금성 다음으로 밝은 행성이 목성이다. 아무리 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하나 눈으로 관측 가능한 천체 대부분이 그보다 원거리에 있으니 목성이 보이는 건 당연할 텐데. 오히려 밤하늘에서 이 친구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울 따름이다.
사람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함께 걷다 목성의 존재를 알려주면 “목성을 눈으로 볼 수 있다고?” 라며 깜짝 놀란다. 그리고 천문가라도 되는 듯 나를 바라봐 준다.
그럴 리가. 나의 천문학 지식은 초등학생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밤하늘에서 알 수 있는 이름은 달, 금성,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 정도? 나머지는 싸잡아 그냥 ‘별’ 일뿐이다.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과학 시간 습관처럼 읊어 머릿속에선 익숙한 태양계 행성들. 고개만 잠시 들어도 이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시도조차 해본 적 없으니 이 얼마나 쓸데없는 앎일까.
밤하늘을 보며 그의 이름을 부르자 목성은 비로소 나에게 실재하는 천체가 되었다. 관심을 가지니 새로운 정보도 쌓였다. 한두 달을 제외하고 맑은 날이면 쉽게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것, 내가 걷는 시간을 기준으로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에 가장 오래, 그리고 선명한 밝기로 볼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머지 태양계 행성을 살피는 것으로 관심이 확장될 법도 하련만, 나는 이 친구가 어디 있는가만 살핀다. 한마디로 목성에 ‘꽂혔다’. 머릿속 지식으로만 있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하는 반가움을 안겨주어 그런 것 같다. 이렇게 밝게 빛나는데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볼 때마다 신기했다. 목성을 보기 위해 작정하고 걷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개를 들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친구이다. 반짝임이 예사롭지 않으니 쉽게 찾을 수 있고 내가 기억하는 모습이 있으니 위치나 밝음의 미세한 변화를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음을 키우는데 이만큼 훌륭한 동무가 또 있을까.
내 주변에도 목성 같은 존재가 있다. 같은 글 모임 회원이기도 한 L 선생님은 일흔 넘은 나이에도 글 모르는 할머니들에게 배움을 선사하고 있다. 40년 지기 내 친구는 언제부터인가 식당에서 남은 음식을 늘 가져간다. 샴푸나 세제를 안 쓴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이런저런 성장통을 겪으면서도 삶의 주인이기를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굳이 남들에게 반짝임을 내세우지 않지만 언제나 빛나는 이들이다.
오직 자신만이 가장 밝은 태양이고 세상의 중심이라며 악 쓰는 이들의 소식만 접하다 보니 살아가기 싫증 날 때가 있다. 이런 꼴이나 보려고 청춘의 많은 시간을 세상 고민에 바쳤나 생각하면 괜스레 억울하고 부아가 치민다. 하지만 잊지 말자. 나에게는 목성이 있음을. 내가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도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록 최고로 반짝이지는 않지만 가장 크고 묵직한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