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과 마음의 안전을 위한 나만의 생존전략
월드컵 4강 신화로 전국이 들끓던 2002년을 공주에서 맞았다. 10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늦깎이 편입생이 되어 처음 독립한 해였다. 아는 이는 같은 처지 후배 한 사람뿐. 우리는 학교 앞은 싫다는 이유로 겁도 없이 시내와 뚝 떨어진 임대 아파트 3, 4층에 둥지를 틀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다급한 목소리 주인공은 후배의 동생. 언니가 여러 번 전화해도 받지 않는다며 확인을 부탁했다. 후다닥 뛰어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핸드폰을 진동으로 해두었을 뿐, 다행히 별일 없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나니 내 번호를 가족에게 알려둔 후배의 엽렵함이 놀라웠다. 그렇게 세심한 친구일 리 없는데. 아니나 다를까, 어머님의 생각이었단다. 핸드폰 외에 다른 수단이 없음을 우려한 최소한의 안전조치였고 연락이 두절되자 지체 없이 가동한 것이다.
나는 치밀함에 한 수 뒤진 가족들에게 부랴부랴 후배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연고 하나 없는 객지에 살고 있는데 걱정 안 되더냐 볼멘소리 해가며. “그 언니도 연락 안 되면 어떻게 해?” 뒤늦게 예리해진 동생의 질문. 벨소리 설정에 무심한 후배의 성격이 떠올랐다. 슬쩍 관리사무소, 과대표 연락처를 추가했다.
다행히 비상연락망을 가동한 일은 없다. 하지만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사고를 떠올릴 때마다 누구에게 도움 요청해야 하나 아득할 때가 있다. 가족은 의지할 수 있는 기본옵션인데 스스로 만든 옵션은 없고, 일터를 옮겨 다닌 뜨내기인 데다 거리 두기까지 하고 살다 보니 비상연락망은 늘 후배 한 사람뿐이었다. 기꺼이 도와줄 사람이 있는데 손 사레를 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진생활 9년 차, 나만의 비상연락망에 추가할 사람들이 떠오른다. 사고를 대비한 목록이 아닌 마음을 나누게 된 이들의 명단이라 대견하다. 떠돌이 같던 삶에 조금씩 뿌리가 생겨 흔들리는 나를 잡아주고 있으니 다행이다.
졸지에 비상대기조가 된 그들의 입장을 굳이 확인하지는 않겠다.(갑자기 동생 연락을 받더라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끊기 없기.)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재주가 없는 나는 독립 초기 나름 ‘생활의 달인’이 되었다. 형광등쯤은 눈 감고 갈고, 전동드릴을 사서 커튼 봉을 직접 달았다. 세탁기 고무관이 빠졌을 때 살짝 분수처럼 물이 새기는 해도 수도꼭지 연결에 성공했다. 지렛대 원리를 이용, 침대 위치를 바꾸고 매트리스를 뒤집어주었다.
중앙난방식 아파트에 살 때였다. 난방이 전혀 되지 않아 침대 안에서 벌벌 떨기를 보름, 참다못해 관리사무소에 연락하니 물 순환 때문이라며 물을 빼주었다. 한 시간도 안 돼 따뜻해진 방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왜 물 빼줄 생각 못해서 사람을 불렀을까.
내 공간에 지인 아닌 외부 사람 오는 일은 그만큼 피하고 싶은 일이다. 일을 해야 하니 시간 잡기도 만만치 않고, 다른 식구 없는 티 날까 신경이 곤두선다. 독신이 들통나면 호기심 어린 질문을 해댄다. 혼자라서 어려웠던 일 다 가져오라며 넓은 오지랖을 자랑하는 이도 생긴다.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나오는 것은 예사, 사는 게 싸다며 새 제품을 강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안전이 걱정됨은 물론이다.
나이가 들다 보니 고치는 것도 쉽지 않다. 끼우기만 하면 됐던 형광등은 LED로 바뀌어 뭐가 뭔지 모르겠고, 높은데 올라갔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다. 그래서 안방은 불 켜지 않고 스탠드를 주로 이용한다. 거실은 불이 두 개이니 차례대로 쓰다 수명 다할 때쯤 이사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안방 TV가 가끔 말썽을 부린다. 일단 껐다 켜본다. TV 전원 한번, 셋톱 박스 전원 한번. 예전 같으면 선을 이리저리 빼서 껴보거나 설정을 다시 하는 노력도 하겠지만 지금은 여기까지가 최선. 괜히 이것저것 해보다 보내버릴 수도 있기에 더 이상 시도하지 않는다. 조용히 인터넷으로 TV 가격을 살피며 완전 사망에 대비 중이다.
여전히 내 공간에 외부인이 오는 것은 번거롭고 두렵다. 하지만 이제 스스로 해결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야무지지 못한 손이 세월 따라 무뎌지기까지 했으니 할 수 있다고 외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원빈처럼 해결해 보자.
“얼마면 돼?”
독신 생활이 길어지면서 걱정이 많아졌다. 밥벌이가 끊어지면 어떻게 살까, 집 한 채 없이 늙으면 어쩌나, 근사한 실버타운 들어갈 정도 벌어놓아야 할 텐데. 가족을 대신할 보호 장치는 경제력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연금이 대세라는데 하나 더 들까, 그래도 보장은 보험이지, 주식으로 좀 불려놔야 하지 않나. 일해서 버는 재주밖에 없는 스스로를 알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자꾸 계산기를 두드리고 전략을 수립했다.
오십 넘어 몸이 예전 같지 않자 불안함은 증폭했다. 노화로 인한 병원비는 시작되면 끝이 보이지 않는다. 3년 전 시작된 아버지의 병원생활을 경험하니 30년 뒤 나의 미래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아픈 게 겁나는지, 보살펴 줄 사람이 없을까 두려운지, 생계가 걱정되는지 알 수 없었다. 불안은 한 무더기가 되어 괴롭혔다. 실체를 밝혀야 했다.
스스로를 책임질 수 없더라도 삶이 이어지는 동안은 내 삶의 주인공이고 싶다.
나이 들면서 생긴 가장 큰 바람이다. 몸이 아프다고 마음까지 의지하지 않는 삶, 필요한 도움은 마다하지 않는 여유와 감사할 줄 아는 내공을 지닌 이가 되고 싶다. 자의식마저 사라진다면 어쩔 수 없지만 깨어 있는 한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
소망을 확인하니 생각이 정리됐다. 경제력은 필요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노후를 위한 내공 쌓기가 필요하다. 늙어감에 대한 불안함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마음을 조급하게 할 뿐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불안해 말고 차분히 준비하자.
오십을 지천명이라 했던가. 노력으로 될 일과, 되지 않을 일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도 순리라면 순리일 터, 하늘의 명을 깨달은 공자인 듯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