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을 견디는 나만의 스파링
한국에서 다수 아닌 삶을 사는 것은 매끄럽지 않은 시선을 감당하며 살고 있다는 뜻이다. 흔치 않은 성, 왼손잡이, 독신인 나는 꽤 이런 눈초리를 겪으며 살았다.
이름을 밝히면 두 번째 물음은 어김없이 “추송웅(당시 유명했던 배우)과는 친척인가요?”였다. ‘추’씨는 한 가족이어야 마땅하다는 듯. 이 질문은 시대 흐름에 따라 추성훈, 추신수 등으로 달라졌다. 묻기 전 말해두지만 이들과 호적상 전혀 관계없다.
왼손잡이는 꽤 큰 대가를 치렀다. 왼손 사용은 천대받던 시절이라 엄마는 딸을 남들과 같게 만들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그 결과, 글씨는 오른손으로 바꿨지만 밥 먹는 손은 끝내 ‘바로잡지’ 못했다.
“계집애가 얼마나 고집이 세면, 쯧쯧.”
“시집가긴 틀렸네. 다 부모 욕 먹이는 짓이야.”
당당히 남의 자식 ‘흠’을 지적하던 시절이었다. 여전히 다름을 불편해하는 오늘이지만 최소한 왼손 쓴다는 이유만으로 부모를 들먹이는 수준은 탈피한 것 같아 다행이다.
오십 대 미혼여성, 현재진행형으로 ‘다름’의 눈길을 많이 받는 영역이다. 나이 따라 감정도 늙는지라 큰 타격은 없지만 잽도 자주 맞으면 아프다. 공격을 막을 수 없다면 스파링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이는 몇 살인가요? 남편 분은 직장에 다니시나요?”
“아직 결혼 안 했어요.”
“아.”
대화가 끊긴다. 상대도 나도 잘못한 게 없는데 죄책감에 빠진다. 했어야 마땅한데 못했다는 듯, 계획은 있는데 미뤘다는 듯 ‘아직’이라는 부사가 나도 모르게 나온다. 상대방은 공식처럼 호구조사를 한 미안함과 정해진 답을 듣지 못한 당혹감을 ‘아’ 한마디로 표현한다.
짧지만 묵직한 정적. 불편하다.
일부 ‘선한’ 이들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어쩌다 그렇게 됐냐고 묻는다. 당신 같은 사람 만날까 봐, 속으로 답한다. 격려하는 척 네가 뭐가 모자라서 결혼을 못하냐고 말한다. ‘너도 한 결혼인데 모자라서 그럴까.’ 쏘아붙이고 싶은 걸 꾹 참아본다.
다수의 삶이 옳다고 여기는 이들의 시각이다. 동의한 바 없지만 까칠해지는 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나의 비혼은 어떤 사연도, 소신도 없다. 물 흐르듯 결혼한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혼자일 뿐이다. 불편한 정적을 겪을 때마다 억울하기 짝이 없던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는 경향은 누구나 있다. 나도 그렇다. 서로 다른 경험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당혹감은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면 어떨까?’ 다름을 고쳐야 할 문제로 여기는 이들은 믿고 거르면 된다.
다양한 경험이 만나는 순간의 정적을 불편해 말고 심상히 밝히자.
“결혼 안 했어요.”
공식석상에서 미혼임을 버젓이 밝힌다. 대접한답시고 ‘골드미스’라며. 결혼 안 했지만 능력은 뛰어나다, 이해심이 높다 등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떠벌이면서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다.
“선생님, 저분 앞에서 말조심하세요.”
“왜요?”
“골드미스잖아. 오십 다 됐는데.”
오십 넘은 미혼 후배가 불과 두 달 전 겪은 일이다. 골드는 뭐고 무슨 말조심을 해야 하는지, 후배의 미스 신분은 언제 밝혀야 하는지 우리는 꽤 진지하게 논의했다. ‘올드’를 ‘골드’로 바꿔주어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 나이에 미스여서 죄송하다고 해야 하나, 말조심할 필요 없다고 안심시켜주어야 하나.
결론은 마주 보며 한숨.
속상하지만 대처할 타이밍 잡기 애매하다. 부지불식간 당한 신상 공개, 흘러가버린 대화의 일부를 붙잡고 정색하기란 쉽지 않다. 예민하거나 속 좁게 보일까 두렵다. 제2의 뒷소리로 이어지기도 한다. “역시 결혼 안 해서 까칠해.” “거봐, 말조심하라니까.”
기회가 된다면 웃으며 말해야지.
골드미스 아니에요. 사람이에요. 결혼 안 한 값을 비싸게 매겨주지 않아도 됩니다. 스스로 금같이 귀한 사람으로 여기며 잘 살아요. 너나 잘하세요.(이건 속으로만)
“결혼 안 했어요.”
정적이 지나고 나면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미안하다는 사과. 다름을 염두에 두지 않은 미안함, 혹은 당혹감의 표현으로 해석한다.
부럽다, 두 번째 반응이다. 자유로운 영혼이니 얼마나 좋겠냐는 것. 육아로 힘들던 시절을 지나 숨 좀 돌리나 했더니 ‘삼식이’ 남편이 놀아달라고 한단다. 정말 부러운 걸까 싶지만 자유에 대한 바람은 이해되는 대목이다.
마지막은 질문이다. “외롭지 않으세요?”
오십 넘어서자 내용이 달라졌다. “(혼자 늙는 게) 두렵지 않으세요?”
상관없는 이들이라면 뾰족한 눈빛, 서늘한 미소, 노코멘트로 답한다. 문제는 마음 통하는 이들이 물어볼 때. 미혼이면 이런 원초적 질문에 답해야 하나, 그렇게 싫을 수 없었다.
어차피 인간은 외로운 존재, 삶은 곧 두려움, 철학자인 듯 허세 부리며 속내를 감췄다. 가장 아픈 손가락이라는 반증 아니겠는가. 몸과 마음의 쇠락이 실감 나니 홀로 두려움을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이 한층 크게 와닿았다. 질문자가 얄미워질 정도로.
누구나 고민은 있다. 혼자 늙어가기 뿐 아니라 자식 뒷바라지하기, 남편과 잘 지내기, 나를 찾기 등 다양한 영역이 존재한다. 그들은 그저 나에게 맞는 애정 어린 질문을 했을 뿐이다. “애 셋인데 힘들지 않으세요?” “가족 말고 자신을 위한 계획은 있어요?” 결혼한 이들도 이런 질문받을 때 있는 것처럼.
묻는 이의 시선이 따뜻하다면 날 세우지 말고 이렇게 답해보자.
“맞아요. 혼자 늙어가는 게 겁나요. 나이 들며 스스로 돌보는 게 자신 없어지다 보니 더욱 그러네요. 좋은 해결책이 없나 고민 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