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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투덜이 Jun 01. 2023

불안 덕분에 잘 살고 있습니다

 - 걱정인형이 신문을 잡은 이유

 나는 불안감이 높다. 할 일이 남아 있으면 그렇게 불편할 수 없다. 화장실 볼 일 말끔히 보지 못한 듯 찜찜하다. 해결할 문제가 없어도 불안하다. 있는데 안 했을까 두렵다. 내 삶의 주인을 내가 아닌 ‘할 일’에 두고 살았기 때문일까. 아무튼 걱정을 달고 사는 편이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불안하기 짝이 없다. 우천 핑계로 면회 못한 아버지 근황, 혼자 부모님을 돌본 동생 마음이 신경 쓰인다. 종일 내리는 비에 ‘사흘 빼고 내내 장마’라는 7월 예보가 떠올라 심난하다. 운동 없이 하루를 보낸 나의 건강이 불안하고 글 쓴다는 핑계로 미뤄둔 집안일이 눈에 아른거린다. 다가오는 목요일, 글에 대한 작가님의 논평 생각에 지금부터 간이 작아진다.  

    

 나를 아는 친구들은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걱정이 늘어지냐고 말한다. 습관적으로 불안해하고 사전 대책을 세우니 “너의 생필품은 걱정인형이야.”라는 이도 있다.     

 

 MBTI(성격유형) 검사 때마다 나오는 파워 T(사고형), J(계획형) 점수. 모든 일의 이유를 성격 탓으로 단순화하는 세태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성격이 팔자’ 대표 사례가 바로 나인가 싶다.  



  

 ‘철저한 계획’ 없이 절대 움직이지 않는 ‘냉철한 판단’의 소유자. 그런 내가 22년 전, 준비 없이 사직서를 던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자신을 책임지는 삶에 더욱 목숨 걸던 때였다. 30대 중반, 여성, 상품성 없는 전문직. 경쟁력 떨어지는 인적 자원임을 알면서도 일을 저질렀다. 나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일터였다. 그럼에도 떠날 수밖에 없었고 후회는 하지 않았다.      


 대책 없이 나온 주제에 청탁 취업은 또 그렇게 싫었다. 부끄럽지 않은 삶이 최고 목표였고 그 목표를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하던 당찬 시절이었다.     


 후회는 없어도 앞날에 대한 불안은 바닥을 잴 수 없을 만큼 깊었다. 그 마음을 때마침 직장을 그만둔 후배와 등산으로 달랬다. 둘 다 산은 쳐다본 적도 없는 운동 무능력자였다. 때늦은 폭설로 눈 덮인 관악산을 아이젠도 없이 뚜벅뚜벅 올랐다. 무식해서 용감한 두 명의 백수 등산객. 앞으로 넘어지고 뒤로 자빠지길 수차례. 보다 못한 생면부지 아저씨가 벗어준 아이젠 한쪽을 산소 호흡기 번갈아 쓰듯 바꿔 차가며 내려왔다. 후배는 그날 들었던 멍이 보름쯤 갔다고 했다. 나는 몸살보다 더 심한 근육통에 시달렸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그만큼 불안이 컸다는 뜻 아니겠는가. 평평한 길도 웬만해선 걷지 않던 두 사람이 매주 이산 저산 마다하지 않았던 건 의미 없는 계획과 막막함으로 가득한 오늘, 그 오늘이 내일로, 모레로 이어지리라는 암울한 분석을 외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소요산 철쭉꽃이 예뻤지만 덕분에 하루를 보낸 것이 더 반가웠다. 소주 한 잔 기울이며 ‘뭐 먹고살지?’라는 절실하지만 답 없는 고민 대신 인수봉에서 내려오지 못해 벌벌 떨던 무용담을 나눌 수 있어 다행인 시간이었다.     



 

 불안을 잠재우는 명약, 등산 처방은 가을까지 이어졌다. 북한산을 오르던 날이었다. 정상 근처였던가,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쉬던 우리 앞에 ‘나풀나풀’ 신문 한 장이 날아왔다. 기사 제목 하나가 두 사람 눈에 ‘훅’ 들어왔다.      


 중등교사도 초등교사 될 수 있다.

 - 절대 부족 초등교사중등교사 자격증 소지자로 충원 방침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후 선진국 기준에 맞춰 부족한 교사수를 늘리던 때였다. 중등과 달리 초등교사 배출은 교대만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에 정부가 일정 기간 교육을 거쳐 중등교사 자격증 소지자를 초등교사로 채용할 계획이라는 내용이었다.      


 관심 있지만 엄두가 안나 구체적으로 알아보지 않던 일이었다. 후배도 그랬다 했다. 우리는 머리를 박고 샅샅이 기사를 살폈다. 어떤 선발과정을 거쳐 무슨 교육을 하게 될지 신문만으로 파악하기 힘들었다. 평소의 나라면, 후배라면 여기까지가 최선. 하지만 명함 없이 지내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있었다. 등산 약발도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다음날, 상담을 위해 노량진 임용고시 학원으로 향했다. 언제나 ‘선착순 마감’의 힘은 강력하다. 정부 방침이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특별반 등록이 오늘로 끝난단다. 길게 늘어선 예비 고시생 행렬은 불안한 마음을 더욱 부추겼다. 홀린 듯 등록.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중견 초등교사가 되었다.     


 22년 전 산행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마법의 양탄자처럼 펼쳐진 신문, 줌 인(zoom in)으로 선명히 눈에 들어온 기사 제목. 불안함에 대한 신의 응답 같던 순간이다. 일이 고될 땐 그때 신문을 펼쳤던 손모가지를 잘라야 한다 말하지만.      


 지금도 ‘걱정인형’으로 살고 있다. 매사 불안해하고 스스로 달달 볶는 내가 못마땅하다. 하지만 그 덕에 늘 계획을 세우고 조치를 취한다. 면회 못한 아버지는 전화로 목소리를 확인하고, 홀로 애쓴 동생에게 카톡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7월 내내 장마 설’에 대비, 집안 곳곳 곰팡이 예상 발생지역을 살피고 습기 제거제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오늘 안으로 운동이나 집안일하기는 틀렸지만 내일 최소한 스트레칭이라도 하자고 다짐해 본다. 그래도 글 쓰는 틈틈이 분리수거는 끝냈다.     


 작가님 논평에 대한 준비는 끝났냐고? 글을 다듬고 또 다듬지만 쪼그라진 간이 커질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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