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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투덜이 Oct 01. 2023

되새길 때만 그리워지는 나날들

‘지금’ 행복하지 못하다면 되새겨서라도 행복하면 되지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보세요.”

“가장 최근 기쁘고 즐겁다고 느꼈던 일은 무엇인가요?”

“머리로 기억하지만 말고 행복했던 그때 자신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다시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해 보세요.”  

   

 몇 년 전 감정코칭 연수 중 이런 질문을 받고 적지 않게 당황했더랬다.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으로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때의 감정을 다시 느껴보라니. “두꺼운 철문을 한 손으로 열어보라.”는 주문이 차라리 더 쉬울 것만 같았다.

답이 손쉽게 떠올랐는지 누가 봐도 행복한 미소가 가득인 사람도 있었고 나처럼 눈만 끔벅끔벅하며 ‘머리를 굴리는’ 이들도 찾아볼 수 있었다.  

   

 “첫 아이 태어났을 때가 바로 생각났다. 감동으로 벅차올랐던 그때를 다시 느껴 정말 행복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여행하던 순간이 생각났다.” “즐거웠던 기억은 나는데 그때의 기분은 잘 모르겠다.”등 수강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나처럼 “행복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어 무얼 떠올려야 할지 어려웠다.”는 의견을 말한 사람도 있었다. 혼자만 '행복감 느끼기'에 어설픈 건 아니라 살짝 마음을 놓았다.

각자의 경험은 다양했지만 행복감을 늘 느끼며 살지는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익숙하지만 정작 각자의 일상에서 중요한 의미로 자리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     


 ‘나는 왜 행복이 뭔지도 모르지? 무슨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을까? 나는 언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지?’

이 날의 연수는 내게 큰 물음을 던졌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2년 전, 신평에 살던 때였다. 뒤늦게 발견한 산책길을 참 많이도 걸었다. 양 옆의 너른 논에 모가 심기고 자라는 것을 보며, 해처럼 크고 둥근달과 나를 졸졸 따라오는 주인 없는 개들과 함께 걷던 길. 1년 뒤 그곳을 떠나게 되니 그 산책길이 얼마나 그리운 지 깨달았다. 이사 후에도 가끔 그 길을 찾아 걷곤 했다. 당시 행복했던 마음을 떠올리며.     

가을걷이가 끝난 산책길에서 만난 해를 닮은 보름달

 혼자 걷던 길도 좋았지만 함께여서 더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다. 뒤늦게 독서모임에 합류한 동료가 같은 동네에 사는 것을 알고 퇴근 후 산책을 공유했다. 뽕나무 열매를 따먹으며, 나무의 이름을 맞춰가며, 어둑해진 날의 별자리를 보며 우리는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나눴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가족들과의 일화, 각자 했던 여행, 좋아하는 노래, 산책길에 반짝이던 별의 정체 등등. 흘러가는 대로 말하고 걷다 보면 두 시간이 20분인 양 훌쩍 흐르곤 했다.

동료의 전근으로 함께 한 시간은 고작 몇 개월 만에 끝나고 말았다. 다시 오지 못한다 생각하니 그 시간이 얼마나 그리운 나날인지 모른다.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마음을 나누며 거닐던 그 순간을 내가 많이 행복해했음을 깨달았다.      


 코로나 직전, 1년간의 연수휴직으로 부모님과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딱히 번듯하게 한 일은 없다. 그저 드라이브 겸 점심을 먹거나, 대중목욕탕 다녀와 차 한 잔 하기, 가까운 공원 걷기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왜일까, 이제 와 생각하니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날들이다.     


 ‘그리워하다.’는 ‘행복하다.’의 동의어일까. 전자의 사전적 의미는 ‘사랑하여 몹시 보고 싶어 하다.’는 말이고 후자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하다.’는 뜻이니 엄밀히 말하면 일치하는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사랑한 순간 어찌 행복하지 않았겠는가. ‘그리움은 행복의 과거형’이라고 하면 궤변이려나.      


 돌이켜보면 나는 뒤늦게 그리워하는 것들이 참 많았다. 늦은 주제에 그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서 오래오래 마음이 아렸고, 삶에 얽매여 허덕이며 살고 있다는 자책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왜 나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함을 느끼지 못하고 항상 되새기며 그리워할까.      


 신평 산책길을 다시 떠올려본다. 뇌경색으로 입원한 아버지, 허리가 부러진 엄마, 과중한 학교 일, 종류별로 말썽을 일으키던 학생들, 어이없는 학부모 민원과 함께 걸었던 길이다. 어찌 행복하기만 했겠는가.

부모님과 함께 한 시간? 식사 메뉴 정하고, 가는 곳의 동선과 주차 상황 살펴가며 거동이 불편한 두 분 챙기느라 진이 빠진 기억들이 녹아있는 시간들이기도 하다.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지지만 당시에는 마냥 즐거울 수 없었던 게 당연하지 않을까.     


 카르페 디엠. ‘지금 이 순간에 충실 하라.’는 의미의 라틴어다. 과거나 미래에 연연하여 ‘지금’ 느끼고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놓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를 사는 건, 더욱이 현재를 행복하다고 느끼며 사는 건 쉽지 않다.

실시간의 삶은 행복해만 할 수 없는 많은 걸림돌이 존재한다. 시간의 체 속에서 이런 돌들이 걸러지고 행복했던 마음만 남을 때 비로소 그리워지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는 ‘되새김질’을 통해 과거형으로 행복해하는 게 아닐까 변명처럼 생각해 본다.      


 현재 진행형 행복감이 덜한 이유에는 삶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도 한몫했다. 머리가 굵은 후 언제나 내 삶의 방점은 ‘책임’이었다. 경제적인 책임, 가족 구성원으로의 책임, 교사로서의 책임, 내가 맺은 인간관계에 대한 책임 등등. 모든 영역에서 제 몫을 다하지 못할까 봐 늘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하루하루가 불행하거나 무의미하게 흘러간 것은 아님에도 방점이 달라서 즐겁고 기뻤던 순간들이 ‘행복’이라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지나친 적이 적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나는 왜 행복이 뭔지도 모르지? 무슨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을까? 나는 언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지?’     


 질문에 답할 때가 왔다.


 나는 힘들었던 순간도 두고두고 되새겨 행복한 기억으로 그리워할 줄 아는 사람이야. 책임지는 삶으로 지나쳐버린 것들을 이젠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그렇게 노력하는 스스로가 대견해서 행복해.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순간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어 다가올 시간이 기대되고 있어. 지금 당장 행복하지 않아도 초조해하지 않을 내공을 쌓아가고 있는 50대 미혼여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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