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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투덜이 Jun 30. 2023

위로 점수 60점, 당신은 합격입니다

 큰 병원 한번 가본 적 없던 내가 2015년 5월, 암 환자가 되었다. 수술과 항암, 방사선 등 병원치료는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꽤 오랜 기간 몸과 마음 모두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신경이 뾰족할 대로 뾰족해져 주변을 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생 중 가장 큰 위기였고 마디마디 힘겹게 느꼈던 시간이다. 혼자 씩씩하게 헤쳐 나가는 척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위로가 절실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 심정을 시험관마냥 점검하고 기준치에 미달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새기는 것으로 드러냈다.     


 첫째, 내 소식을 들은 이들의 반응을 평가하여 위로 점수를 매겼다. 

언제 알았는지, 증상은 어땠는지 형사처럼 꼬치꼬치 묻던 이들. 걱정하는 건지, 호기심 채우는 건지 모르겠다, 60점, 간신히 통과. “어떡해, 어떡해.”라며 줄줄 울기만 해 되려 내가 달래주어야 했던 친구, 50점, 미달. “몸 생각 않고 죽어라 일만 하더니 그럴 줄 알았다.” 이 와중에 야단치는 사람, 40점, 너도 미달. 영 반응 없어 재차 연락하자 세상에, 일이 바빠 깜박했단다. 점수도 아깝다, 넌 아웃. 

합격 점수를 받은 이는 손에 꼽았다.     


 위로의 격 따지기. 내가 내린 두 번째 조치였다. ‘으뜸은 아무 말 없이 꼭 안아주던 사람’이라며 힘이 되는 위로를 특정했다. 진심 가득한 눈빛, 다독거리는 손길만으로 더할 나위 없는 격려가 되는데 구구절절 말은 필요 없다, 진정한 위로는 따로 있다는 지론을 기회 있을 때마다 밝혔다. 위로에도 등급이 있다는 듯.    

  

 지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마음을 전하려 애썼지만 대부분 닿지 않았다. 위안은커녕 상처만 후벼 판다며 날을 세웠다. 성에 차지 않은 위로는 진심이 부족해서라 여겼다. 나는 제대로 위로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서운함을 쟁여갔다. 대놓고 그들에게 섭섭함을 전하지 않았지만 마음속 점수 미달자는 늘어만 갔다.     


 암 판정받은 후 가입한 카페에서도 비슷한 경험담이 오갔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그들과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눴다. 투병 소식을 들은 지인들 반응에서 옥석을 가렸고, 격한 토론을 해가며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스트레스는 암의 가장 큰 적이니 볼 사람 안 볼 사람 잘 구별해서 마음 편히 살자고 입을 모았다. 

이러이러한 태도라면 절대 진심으로 위로하는 사람일 리 없으니 인생에서 지워라, 그 상황에 그런 말을 했다면 믿고 의지할 사람은 아니다 등등. 평가는 매섭고 위로와 격려가 되는 사람이 주변에 많다는 이는 별로 없었다.     


 내 것일 줄 몰랐던 불행과 공포 앞에 온통 고약한 감정과 생각만 앞서는 상황이었다. 어떤 위로라고 쉽게 귀에 들어왔을까. 안타까움과 걱정으로 글썽이던 눈물은 보이지 않았고, 핸드폰 너머 목소리의 떨림까지 알아차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말은 말일뿐, 담긴 진심은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 웬만한 말은 다 고깝게 느껴질 밖에.     

 내가 아파도 세상이 돌아가는 게, 그들이 일상을 사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 말에 담긴 내공을 알고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가 빠진 일상이 일상일 수 있다는 인정도, 용납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카페에는 “마누라가 이렇게 아픈데 남편이 야근 때문에 늦는대요. 같이 살아야 할까요?”라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공감할 수 없는 고민이었지만 왜 그런 마음이 되는지 이해했다. 그러니까 나도 바빠서 연락 깜박한 친구를 마음에서 아웃시켰겠지.     


 어느 날, 그 친구와 차를 마셨다. 아웃은 마음일 뿐, 30년 넘는 시간으로 이어진 동무였다. 섭섭함이 아주 가시지 않았던 터라 지나가는 말인 척 당시 심정을 전했다.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 많이 서운했겠네. 미안해. 변명 같지만 새로운 업무를 맡아 정신없이 바빴어. 그런데 나는 네가 아픈 뒤로 너와의 약속 한 번도 거절한 적 없어.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만은 꼭 하자고 다짐했거든.”

그랬다. 친구는 내가 연락하면 거기가 어디든, 언제든 달려와 주었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한가한 녀석도 아니었는데 왜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까. 나라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 친구가 주는 엄청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있던 건 나였다.      


 불행에 휩싸여 내민 손길을 인정하지 않고 근거 없는 서운함만 쌓던 속 좁은 내가 보였다. 진심으로 미안하고 고마웠다. 비로소 그가 주는 위로가 오롯이 내게 닿아 힘이 되었다.      


 위로는 주는 게 아니라 받는 것이다. 어떤 위안도 당사자가 받지 못하면 힘이 되지 않으므로. 격 따위는 없다. 말없이 안아주는 행동이 으뜸이었던 건 그때 내 마음이 ‘말의 위로’를 받을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보여준 진심이 잘못됐거나 방법이 나빴던 것이 아님을 깨달은 순간, 블랙리스트를 감사 명단으로 대체했다.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소중한 마음들이다.     


 이제 나는 혼자라 느껴지면 ‘아, 위로받을 준비가 안 됐구나.’ 여기려 노력한다. 위안이 되고자 하는 이들을 의심하고 평가하기보다 마음속 힘이 쌓이길 기도한다.      


 위로를 줄 때도 마찬가지. 나의 격려에 날카로운 반응을 보인다면 어설피 다가가지 않고 기다린다. 내가 주는 위로를 받을 여유가 생기기 바라면서. 그 사람이 지금 받아들일 만한 위로가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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