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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소리 Jun 20. 2023

유럽인 듯, 아닌 듯

[시칠리아 여행 8]  팔레르모 건축 순례

팔레르모 출발을 하루 앞두고 돌이켜보니 일주일 동안 있었는데 정작 시내는 가본 데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 하루 동안은 주요 명소를 점찍기식으로나마 둘러보기로 했다.     


가이드북에 따르면, 노르만 왕궁은 팔레르모 관광명소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근데 하필이면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에 방문하는 바람에 왕궁은 들어가 보지 못했다. 숙소가 지척이고 한 주일 동안 있으면서도 왕궁을 못 가본 사람은 아마 나뿐 아닐까. 아쉽지만 왕궁 안의 부속 성당인 팔라티네 채플은 개방되어 있어 둘러봤다. 이 성당은 왕실 전용이니만큼 건물의 방 한 칸을 차지하는 작은 채플에 불과했다. 이 작은 공간에 한 무리의 입장객이 들어서니 천장 외에는 인간의 뒤통수만 보일 정도였다.      

노르만 왕궁의 외관

근데 이 작은 방 내부는 여백이란 여백을 온통 화려한 모자이크와 조각으로 장식해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채플 문으로 들어서면 제대 중앙에 예수의 모습을 새긴 황금빛 모자이크가 눈에 들어온다. 비잔틴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이 ‘크리스토 판토크레스토레’라는 양식의 작품은 인근의 체팔루, 몬레알레와 더불어 노르만 양식의 전형적 사례로 꼽힌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남부의 섬이고 지리적으로는 서유럽으로 분류되지만, 건축이나 문화는 유럽과는 다른 생소한 모습을 많이 갖고 있다. 시칠리아는 로마가 멸망한 후에도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제국 영향하에 있었고, 아랍 점령기에는 모스크를 비롯한 이슬람 건축이 대거 들어섰다. 그런데 북유럽의 노르만족(바로 바이킹)이 이 섬을 점령해 기독교 건축을 대거 세우면서 중세 유럽 특유의 고딕 외에 비잔틴과 아랍 등 여러 가지 양식이 뒤섞여 노르만 양식이라는 독특한 이국적 경관을 이루게 됐다. 비잔틴식의 황금 모자이크, 유럽식의 고딕 건축, 아랍식의 조각과 타일 장식 등이 그렇다. 거리 모퉁이를 기웃거리고 새로운 음식을 접할 때마다 때로는 유럽인 듯, 때로는 모로코나 터키에 온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팔라티네 채플 내부의 화려한 장식. 오른편은 비잔틴 식의 황금 모자이크로 새긴 예수상으로 노르만 성당의 한 특징이다.

왕궁을 나와 몇 발자국만 옮기면 이탈리아 대도시에서 흔히 만나는 ‘두오모’라는 이름의 성당이 나온다. 중세 시절 교회는 종교뿐 아니라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기에, 흔히 권력과 권위의 과시용으로 성당을 엄청난 규모로 짓곤 했다. 팔레르모의 두오모는 시칠리아 땅에서 권력의 중심지답게 일단 규모로 방문자를 압도한다. 실내로 들어가면 주요 성인과 왕의 묘지가 회랑 좌우에 있고, 성당 내에는 자랑거리로 삼을 많은 보물도 많이 소장하고 있다. 원래 건물 옥상에 올라가는 거 이제는 그다지 안 좋아하는데, 여기서는 지붕과 탑에서 내려다보는 성당 건축과 주변 시가지 풍경이 매우 인상적이다.     

두오모 성당의 안과 밖

숙소를 엠마누엘레 거리에 잡은 덕분에, 주변에도 이국적인 명소가 널려 있었다. 숙소 바로 옆 프레토리아 광장에는 중앙의 분수대를 둘러싸고 있는 산 카탈도 성당과 카타리나 알레산드로 성당 등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아담한 산 카탈도 성당은 지붕에 세 개의 빨간 돔을 얹은 것이 특징인데, 바깥에서 보면 마치 아랍의 모스크가 연상된다. 광장 건너편 알레산드로 성당은 가이드북에도 나오지 않는 곳이지만, 다른 유럽 도시에서라면 도심의 명소 대접을 받을 만했다. 예산 부족으로 여기저기 쇠락한 채로 방치되어 있긴 했지만, 대성당은 여전히 바로크 시대에 전형적인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방문자가 적어 마치 중세로 돌아간 듯한 적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사실 팔레르모에는 이런 곳이 도시 여기저기 널려 있다.      

산 카탈도 성당의 와부와 카타리나 알레산드로 성당 내부

산 카탈도 성당 옆 건물인 산타 마리아 델 라미랄리오 성당(속칭 마르토라나)은 시칠리아 복합 문화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바로 이웃의 산 카탈도 성당이 그리스 건축 기둥에 아랍풍으로 노르만족이 세운 건축이라면, 이건 알바니아계의 동방가톨릭 교회다. 동방가톨릭 교회란 로마교황청 소속이면서도 현지 문화에 맞춰 전례만 정교회식으로 하는 가톨릭을 말한다. 정교회가 주류이던 땅에서 살아야 했던 가톨릭 소수파의 애환을 보여주는 흔적으로, 동서 유럽 세력의 교차지이던 동유럽 국가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교회다.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본 프레토리아 광장과 분수대

팔레르모 시내에는 오랜 역사적 유적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해가 떨어질 무렵 마시모 극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크고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오페라 극장이라는 사실은 오페라와 담쌓고 사는 대다수 사람들에겐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사소한 정보에 불과하겠지만, 할리우드 대작 <대부>의 배경이라면 아마 더 친숙할 것이다. 이 3부작 영화에서 3편 마지막의 오페라 공연과 비극적 엔딩의 장소가 바로 여기다. 수백 년 전 실제 인간들의 전쟁과 정복, 영웅담, 사랑과 배신의 현장에는 시큰둥한 사람들이 정작 허구에 불과한 영화 배경에 열광하는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인 베로나에 몰려든 사람들은 허구이지만 아름답고 비극적인 사랑의 환상에 빠져든다. 시칠리아는 수많은 역사적 스토리가 얽힌 실제 역사 유적뿐 아니라 온갖 영화 촬영지도 무수하게 갖고 있으니, 이 점에서도 여행자에겐 매력적인 장소인 듯하다.

해질 무렵의 마시모 극장. 이 계단에서 대부 영화의 마지막 비극적 장면을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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