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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mwonkang Aug 01. 2024

열 두발 상모를 돌리던 아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던 욱이

  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1985년 9월  1일 자로 받고 세 번째 학교에 근무할 때 참 많은 일을 했다.

2학년 담임을 맡고 업무는 경리, 학교신문, 학교문집과 농악선생 맡았다.

  모두 처음 해보는 업무지만  젊었기에  업무에 대한 두려움과 아무런 거부감 없이 기꺼이 맡았다.

그 시절엔 업무가 일단 주어지면 무조건 업무를 맡아해야 했다. 그런 시절이었다.


운동회때 농악시연

농악율동을 위해 새벽부터 꽹과리를 치 율동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다른 선생님들이 나를 미쳤다고 했다.

"뭐 하는 짓이야?"

"미친 거 아니야?"

내가 생각해도 미친 듯이 일했다.


식사를 하며 음식을 씹을 때 그 음식 씹는 소리가 꽹과리 소리로 들렸고 꽹과리 소리가 들리는 곳이면 어디든지 쫓아다녔다.


"농악선생님요, 농악선생님!"


아이들이 나를 그렇게 불렀다.

3학년 아이들부터 6학년 아이들까지 농악대 80~90명 정도로 구성되어 있으니 농악선생의 권한은 막강했다. 2학년 담임에 3~6학년까지 거의 전교생 아이들을 아우르고 있으니 농악선생만큼 인지도도 높고 인기와 관심과 권한 막강한 사람 학교에 별로 없었다. 그만큼 힘들었단 말이다.


그때  그 학교 한일시멘트에 다니던 분들의 자녀가 80~90%였다. 그래서  버스가 필요할 때는 언제나 지원을 받았 테스장, 체육관, 골프 연습장까지 1988년도 이전에 한일시멘트에서 다 만들어 주었다.

또. 발전가금도 그 당시 100만 원이라는 큰돈을 주기도 했다. 한일시멘트회사 부설초등학교처럼 필요하면  언제든지 도움을 주었다.

농악대는 군대표로 소백산철쭉제 등 군행사에 특별출연을 했고 충주에서 열리는 북부지역 농악경연대회를 매년 참여해야 했다.

군민행사 특별출연, 아이들이 태평소를 불고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였다. 잡색 중 호돌이 복장을 두 명에게 입혀 본부석에 올라가도록 시켰는데 재롱을 떨며  놀자 기관장님들이 금일봉을 내놓으셨고 그 돈으로 아이들에게 짜장면도 사주고 공책을 사서 나눠주기도 했다.

그 해에 2학년 담임을 하고 있었는데 11월에 후배선생님이 청주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후임으로 신규 교사가 오는데 6학년을 신규 교사에게 맡길 수 없다며 6학년을 담임을 맡아 달라고 교장선생님께서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11월에 6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특이한 경우이다. 중간 발령도 그렇고 2학년 담임을 하다가 6학년 담임으로 가는 일도 일상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맡게 된 반 아이들의 세력변화가 일어났다. 그 반 아이들 중 농악 아이들이 갑자기 힘이 생긴 것이었다.

그동안 조용히 지내던 농악 아이들이 가세 등등 해진 것이다. 농악선생이 담임이 되었으니 그럴만했다. 농악 아이들은 그 반에서 큰  존재감을 갖는 아아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담임이 바뀐 이후 아이들의 태도는 자신감 넘치는 아이들로 바뀌었다. 그때 아이중 남자아이인 욱이가 있었다. 말없이 묵묵하고 키가 큰 남자아이였다. 담임을 맡게 되면 종종 눈에 늘 밟히는 아이가 있다. 욱이가 바로 그런 아이였다. 11월에 담임을 맡아 큰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욱이가 부모가 없고 삼촌이 돌봐주는 데 집이 없어 남의 집에서  살기도 하며  어렵고 불안전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특히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고 취업에 나선다는 욱이 삼촌의 말을 듣고는

 가슴이 막막했다.

욱이는 농악대에서 열 두발 상모를 맡았다.

일반상모 돌리는 것도 어려운데 열 두발 상모는 정말 힘든데도 열심히 노력해  멋진 솜씨를 뽐냈다. 욱이가 열 두발 상모를 멋지게 돌리고 나면 사람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열 두발 상모를 돌리던 아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욱이 내 마음 속에 늘 애잔한 아픔으로 남아있다. 늦게 알아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늘 나를 괴롭혔다.

  지금쯤 어른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성실하고. 멋진 아이니까.


"욱아! 선생님이 너무 늦게 알아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 잘 살고 있지?"


1988년 북부지역농악경연대회에서 특상을 받았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도에 우리 농악대는 농악경연대회에서 특상을 받았다.

물론 욱이의  열 두발 상모 돌리기 묘기도 특상을 받는데 큰 기여를 했다.

농악경연대회 행사로 돼지, 닭, 오리 등 동물을 운동장에 잔뜩 풀어놓고 농악대 아이들이 잡는 대로 가져가는 동물농장 행사가 있었다. 신이 나서 열심히 동물을 잡으러 뛰어다니던 욱이가 생각난다.

"꿀, 꿀, 꿀~"

"꼬꼬댁~"

동물들은 도망가느라 정신없고 아이들은 잡으러 다니느라 신이 났다.


"닭 잡지 말고 돼지를 공략해."

아이들에게 주문했다.

그러나 우리 농악대는 그때, 돼지 한 마리, 닭 다섯 마리를 잡았다. 덩치 큰 욱이가 돼지를 잡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한일시멘트 버스 두 대를 지원받아 여행 가듯 다녀온 1988년도의 북부지역 농악경연대회

잊을 수 없다. 그 해 11월에 6학년을 맡아 가르치다가 졸업시킨 아이들이 지금도 생각난다. 학급학예회 때 빗자루를 들고 나와 '집시여인'을 신나게 부르던 아이들~

특히, 열두 발 상모를 돌렸던 욱이가 늘 마음을 찡하게 만든다.

"잘 살고 있는 거지? 욱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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