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코로나19로 해외입국자 자가격리 해제를 발표한 지 1주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카타르를 경유하여 파리로 가는 비행기는 왕복 80만 원, 고민도 하지 않고 결제부터 한 뒤 나에게 남은 약 24시간이다. 첫 유럽 여행에 갈 준비를 서둘러야 했고 파리 입국을 위해 Pcr 검사도 해야 했다. 제일 빠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곳으로 예약하고, 환전도 해야 하고, 한식 없이 살 수 없는 나는 라면도 꼭 사야 했다. 가장 중요한 캐리어와 멀티 어댑터를 까먹고 있던 나는 쿠팡이 구세주였다. 내구성, 가격은 중요하지 않았고 가장 빨리 도착하는 걸로 급하게 구매했다. 파리가 옆 동네 일본도 아니고, 유럽 여행을 자주 가본 것도 아니고 이렇게 우왕좌왕하면서 가야 하는지 스스로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현실적인 고민이 선택으로 이어져 여행을 포기하기 전에 떠나야 했다. 기적적으로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 10분도 채 안 남았을 때 캐리어가 도착했다. 대충 밀어두었던 짐을 욱여넣고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당시 국내여행도 조심스러웠던 시국인지라 큼지막한 캐리어를 끌고 있는 내 모습은 내가 보아도 이질적이었다. 그제야 와닿기 시작했다. '뭐부터 해야 하지.. 아 체크인 체크인 어떻게 하더라 아.. 나 갈 수 있을까' 우왕좌왕 혼란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체크인을 무슨 정신으로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하며 비행기에 몸을 넣었다. 출발한 지 1시간 정도 지났을 때, 기내식이 나왔다. 나는 식사에 와인을 마셨고 긴장이 풀렸는지 바로 잠들었다. 곧 착륙한다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10시간 이상을 깨지도 않고 잔 것이다. 나는 비행기가 체질인가.. 어안이 벙벙한 채로 경유지인 카타르에 도착했다.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너무너무 간절했다. 유럽은 아이스아메리카노가 없다던데, 마지막으로 먹어야 한다면 지금이 기회란 생각에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이 몰려있는, 카페로 보이는 곳으로 갔다. 눈을 크게 떠도 메뉴판엔 과일 주스에 없었다. 그냥 과일 주스 먹을까 vs 그래도 주문해 보자의 내적 갈등 중 직원과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나를 향해 상냥히 웃으며 주문하라고 했다. Umm... Can i get... essofresso and ice.. and .... Shake it please.. 형편없는 내 영어 실력이 너무 수치스러웠지만 그보다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더 간절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직원은 곧바로 내게 oh,! Ice americano? okay. 그 대답에 나는 더 수치스러웠다. 아이스아메리카노는 메뉴에 있었던 것이다. 수치심과 바꾸며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얻은 아이스아메리카노에 너무 행복해하며 3시간의 경유지 대기를 버틸 수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꽤나 많이 의식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간절한 게 더 크구나 나는. 새롭게 알게 된 첫 번째 내 모습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파리에 도착했다. 숙소는 공항에서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소매치기의 두려움으로 미리 한인 택시를 운영하는 곳에 연락하여 대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 내 수하물이 나오지 않았다. 좀 더 대기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15년째 파리에서 이 일을 하면서 파리에서 1시간 이상 수하물을 찾지 않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며, 쇼핑 따위의 개인적인 시간으로 딜레이 된다고 생각했던 택시 기사님은 돌아가겠다고 했다. 기적같이 그 타이밍에 내 짐을 찾았고 부리나케 뛰어가 기사님을 만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축구선수 엄청난 무리가 나와 같이 비행기를 타며 벌어진 이례적인 이슈였다고 한다.
기사님이 물어보셨다.
"비즈니스 여행이신가 봐요?"
"아니요. 그냥 여행인데요!?"
"근데 왜 이렇게 관광지랑 떨어진 위험한 곳에 숙소를 잡으셨어요? 심지어 여자 혼자.."
"네? 숙소 찾다가 평점이 높아서 예매했는데요..?"
"아가씨 그 영화 테이큰 봤어요? 여기가 그 일이 진짜로 벌어진 지역이에요."
"전 어떻게 해야 하나요?" What the fu**..
"영업상, 내가 호텔을 추천해 줄 순 없지만 이 지역은 혼자 여행하기에 위험해요. 구 자체는 위험하지 않지만 경계를 두고 위험한 구 바로 옆이에요. 숙소를 옮기시는 걸 추천해요. 내 조카도 여행 와서 비슷한 지역에 머물렀다가 강도 맞아서 급하게 귀국했어요.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행지인 파리고, 아가씨도 쉽게 온 건 아닐 텐데 좋은 기억으로 남는 여행지가 되면 좋겠어서 하는 말이에요."
나는 우습게도 당당히 할렘가에 4박 5일 예약했던 것이다. 나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