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싶었다. 이곳 서울로부터.
나는 아직 교사가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는데 막상 임용고시에 올인하자니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정교사가 되고 나면 다른 일을 시도해 보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아, 그전부터 관심 있었던 영업직에 도전해 입사했지만 대기업 2군데 모두 당일 퇴사를 했다. 어떤 이는 경솔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타인의 삶에 기여하고 싶은’ 내 가치와 맞지 않았다. 회사는 이익을 추구하는 게 목적이라는 것을 들어가서야 알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는 생각에 더 고민해 볼 것이 없었다.
내가 상담을 전공하게 된 것은 어릴 때 상담을 통해 회복했던 경험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보다 좀 더 솔직한 답은 누군가, 나에게 이 모든 게 내 탓이 아니라고 했던 말 때문이다. 부모님의 재혼, 정서적 학대, 외로웠던 모든 순간들이 내 탓이 아니라고 했던 말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말, 위로를 해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에 시작된 나의 첫 번째 꿈이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사립학교에서 기간제교사를 하게 되었다. 성취감은 상당했다. 문제라고 의뢰되어 상담실로 온 아이들은 내 눈엔 전혀 문제로 보이지 않았다. 각 사람의 히스토리가 있을 뿐. 함께 버텨주기만 해도 회복되는 아이들도 많았다. 게다가 나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곧바로 눈이 휘둥그레지기 일쑤.. 나도 했으니까 너희도 할 수 있다는 말에 위로를 받기도 했고 본인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결과에 이르는 것을 보며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만큼 정서적 소진이 상당했다. 퇴근하고도 일이 off 되지 않아 집까지 끌고 들어오는 날이면 밤새 두통과 잠을 깊게 잘 수 없었다.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사례가 있을 때면 고민에 잠겨 지하철을 타고 도착지보다 한참 지난 곳에 내려 지각을 하기도 했다. 이 소진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나도 상담 선생님을 만나고 취미 생활을 해보았지만 채워지지 않는, 해결되지 않는 마음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계약 연장을 하자고 했다. 고민을 해보겠다고 했다. 겨울 방학이 되었고 나는 당시 유행하던 코로나19에 전염되었다. 신체적 증상이 꽤나 오래 지속될 것 같았고 3월엔 근무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쉬고 싶은 생각이 더 컸다. 덕분에 계약을 연장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럴싸한 이유가 생겼고 한동안 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나는 사회 부적응자일까, 나와는 맞는 일이 없는 것만 같았다.
쉬는 동안 성수동에 열리는 한 사진전에 다녀왔다. 작가는 직접 여행을 다니며 찍은 사진을 전시했다. 다채로운 색감과 풍경에 그만 넋을 놓아버렸다. 수많은 사진을 보며 이 감동적인 풍경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할 즈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가야겠다 나.‘
부모님이 반대하는 전공을 선택하고 도망치듯이 집을 나왔던 나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생활비와 학비를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원하는 대학원 진학을 앞둔 4학년 때는 인턴 3개와 알바 그리고 대학수업과 병행하며 대학원 입시를 준비했다. 노력 끝에 원하는 대학원에 진학했을 땐 낮엔 조교 그리고 저녁엔 대학원 수업을 들었고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기간제 교사로 1년 근무했다. 서울에서의 월세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선 무언가 즐길 여유 없이 조금도 쉴 수 없었다.
전시를 보면서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하고 싶다는 열망에 전시회 관람이 끝나자마자 예니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예니는 이미 프로 여행러였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배낭 하나로 남미, 캐나다, 동남아를 섭렵한 사람이기에 내 마음을 잘 알아줄 것 같았다. 내가 느낀 것, 그리고 현재 나의 금전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체코 정도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예니는 나에게 말했다. "매리야 돈을 떠나서 네가 가장 가고 싶었던 나라에 가면 좋겠어." 내 상황을,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예니의 답이다.
가장 먼저 떠올린 건 프랑스 '파리'였다. 어릴 때부터 이유도 모른 채 프랑스에서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던데. 그렇게 나는 파리행 비행기에 탑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