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가는 재능

유진목 산문 《재능이란 뭘까?》를 읽고나서

by 소방작가

직장에서 초과근무를 몇 시간 하고, 퇴근해서 잠시 쉬었다가 한 대학병원에서 소방공무원 정신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결과는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일상적으로 찾아오는 불안을 제외하면 죽고 싶은 마음도 없고, 괴롭지도 않습니다. 동네 정신건강의학과의원에서 처방받은 약물을 복용한 영향으로 괜찮은 결과지를 받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진을 해주신 교수님은 이제 약물의 도움 없이 불안 증세를 관리해보고 싶지 않은지 물어보셨습니다. 저도 약물을 끊는 것이 목표이지만, 처방약을 내어주시는 주치의 선생님은 우울증 관련 약물은 임의로 끊을 수가 없으며 완전하게 프로그램을 종료하지 않으면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 먹던 용량에 비하면 절반으로 줄어들기는 했어도, 의원에서는 앞으로 1년을 채워서 약물을 복용해야 할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습니다. 대학병원에서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취미생활을 통해 몰입하는 경험을 이용하면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게 있어서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은 글쓰기가 아닐까 합니다. 글을 쓰면 주제에 집중하느라 잡념이 사라집니다. 글을 읽는 것도 내가 아닌 것에 접속하여 열중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최근 유진목 시인의 에세이 《재능이란 뭘까?》라는 산문을 읽었습니다. 그는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의 저자 로버트 맥키의 문장을 예로 들며 '시나리오에서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않을 지 결정하는 것이 재능인 것처럼, 삶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지 결정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재능'이라고 말합니다. 영화에서 감독은 서사의 물줄기를 따라 관객에게 노출해야 할 인물과 사건을 결정하고, 그렇게 구성된 장면은 영화를 이루는 전부가 됩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삶이 나를 위한 영화라고 치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살지 않을지 결정하는 것은 시인이 말한 것처럼 분명한 재능일 것입니다. 유진목 시인은 시를 쓰는 것, 산문을 쓰는 것을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도구로 활용하였습니다. 그것이 유진목이라는 영화의 미덕입니다.


그의 글에 집중해보겠습니다. 시인이 쓴 텍스트에서 드러난 작가 자신은 무척 위태로워 보입니다. 그는 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울하고 아픈 상태인 것 같습니다. 작가는 복용하고 있던 항우울제를 한꺼번에 모아 삼키며 약물 중독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간 적이 여러번 있었을 만큼 삶에 대한 의지가 박약했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딛고 계속 살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시인 유진목을 살리기 위해 애쓴 사람들 덕분이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집에서 함께 먹고 자며 보살펴주었던 사람들 덕분에 더이상 죽게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죽음이 더이상 자기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살고, 글을 쓰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시인의 재능이 스스로를 죽지 않고 살게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왜 스스로 죽으려고 했던 것일까요. 아래에 쓰인 시인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찢어집니다.


"자식을 낳아 키우면 안 되는 사람들이 나를 태어나게 하고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용서할 수 없다." (p. 57)


삶을 살아가며 응당 받아야 할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음을 이보다 직설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통증이 전해지는 시인의 문장을 보면, 제가 겪었던 아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중등 교과 과정을 수월하게 해냈던 것에 비해 고교 과정은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잦은 실직으로 생계가 막막해진 부모님은 고물상에 폐품을 수집하고 판매하는 일을 시작하셨는데, 천한 일을 시작할 만큼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렸다는 자학과 좌절이 가정 내에 있어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잦았습니다. 중학교 때와 달리, 고교에서 학급 석차가 떨어지자 어머니는 저를 포기했다며 네 빨래는 네가 알아서 하라며 날마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가 제 삶에서 진정으로 죽고 싶은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학급 학우들이 반장으로 저를 선출해주었음에도 스스로의 사정이 궁핍하고 떳떳하지 않았던 부모님은 쓸데없는 반장은 뭐한다고 하냐며 당선을 물러오라고 하셨습니다. 다음날 담임선생님께 반장 당선을 취소해달라고 말하며 극심한 모멸감과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제 삶을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잦은 실직과 어머니가 비정규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두 분이 농촌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탓이 컸습니다. 두 분은 모두 도시의 하층민으로 유입되어, 계급 상승을 바랄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맞춤법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어 문장을 올바르게 구사할 수 없었고, 영문을 읽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사회적 문맹 상태에서 디지털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는 사회가 무섭고 두려웠을 것 같습니다.


제 부모님이 도시에서 생존하는 방법은 비정규적인 일을 끈질기게 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먹고 살 수 있을 뿐, 그들이 소망하는 계급 상승의 욕망을 충족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형편의 발전을 위해서는 제 성장이 중요했을테지만, 정작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알 수 없었기에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청소년 시기에 제 불안은 물장구를 치고 있음에도 물살의 흐름에 밀려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에 기인하고 있었습니다.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좌절된 부모로서의 욕망은 학대로 이어졌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것, 연극을 한 것 등은 제 미래가 불투명한 것에 더해 자신들의 생계까지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느꼈는지 부모님은 청년이 된 이후에도 분노의 목소리로 자신의 불안을 투영하였습니다. 부모님의 그늘은 제가 연극을 그만두고 소방공무원 공채 모집에 합격했을 때 해소된 듯 합니다. 제가 그들의 짐이 되지 않은 이후에야 계급과 생존에 개의치 않는 모습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분명 담요를 뒤집어 씌워 숨을 쉴 수 없게 했을 때는 자식을 낳아 키우면 안 되는 사람들이 나를 태어나게 한 것이 용서할 수 없었지만, 글을 쓰게 되고 난 이후에는 나에게도 부모님에게도 삶이란 통제가 불가능한것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며 제 스스로에 대한 연민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방서에 들어가 출동 업무를 통해 엉망으로 망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만나 연민할 수 있었습니다.


황정은 소설가는 최근에 낸 산문 《작은 일기》에서 희망을 믿기보다는 가능성을 믿는다는 록산 게이 작가의 말을 긍정하게 되었다고 썼는데, 저는 희망도 없고 가능성도 없다면 무엇으로 삶을 긍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회복에 대한 희망도, 가능성도 없는 환자들이 주변에 늘 있기에 그렇습니다. 특히 온 몸의 근육이 굳어 죽음에 이르는 파킨슨병 환자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보통의 환자들 같은 경우에는 질병이 삶에서 피치 못하게 발생한 비용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원활히 순환하는 삶의 궤도에서 일시적으로 이탈하는 사고말입니다. 그러나 병이 오래되고 깊어져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환자들은 병원에 가는 것이 비용이 아니라 일시적 구원이라고 느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호흡에 사용되는 불수의근이 굳어가는 것이 느껴져 숨 쉬는 것에 제대로 되지 않을 때, 홀로 고립되어 절망적인 심상에 빠져 무서울 때 누군가 곁에 있어주는 곳이 병원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삶이란 다층적이고 상대적이며, 때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어렵고 복잡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든 써보려고 합니다. 쓴다고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쓰게 되면 아픔이 어디쯤에서 나오는 지 어렴풋하게 알 수 있습니다. 유진목 시인의 산문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나는 인생에서 고통스러운 부분을 글로 써서 나누려 하고 좋은 것은 혼자서 좋으려는 경향이 있다. 좋은 것은 각자 좋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통은 공동의 문제가 될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나는 고통이 공동의 경험이 되길 원한다. 어쩌면 여럿이서 함께 고통을 끝내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pp. 93-94)


유진목 시인의 글에서 문학의 본령이 노출되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고통을 공통의 경험으로 환원하여 아픔을 무마하고, 결국에는 삶의 다음 장면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힘 말입니다. 아픔을 감내하면 개인의 일로 종결되지만, 고통을 내보이면 괴로움은 우리의 문제가 됩니다. 마치 말기 암환자가 통증 조절을 위해 구급차를 부르면, 그의 아픔이 소방관과 의료진 그리고 보호자 공통의 사건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각각의 주체들이 환자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낫게 하기 위해 기능하는 과정에서 환자는 존엄하게 병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됩니다. 일부 암환자의 경우에는 통증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상태가 호전되는 유의미한 증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디에서도 글쓰기와 관련한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제법 긴 문장을 어렵지 않게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쓸 수 있음이 결국 제 삶에 새겨진 흉터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 알 수 있습니다. 제 흉터를 쓰는 것은 유진목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일종의 살아가는 일에 대한 재능일 것입니다. 제가 가진 재능을 통해 괴로움과 아픔이 우리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에 대해 함께 사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제가 삶을 통해 만들고 있는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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