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편지 - 25년 11월
비가 옵니다. 한동안 뜸하던 비님이 이번 주 들어서 자주 찾아오시네요.
가뜩이나 위태롭게 달려있던 빨강, 주황, 갈색 잎들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순식간에 나목이 되어버린 모습이 약간 애처로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는 나무를 도와준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해도 떨어지지 않는, 겨울을 위한 준비를 비가 한껏 도와준 것일 테지요. 비가 내리고 난 자리에는 알록달록 낙엽 동산이 만들어집니다. 꼬마들은 낙엽 동산을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밟아도 보고, 모아도 보고, 푹신푹신 뛰어다녀보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그런 꼬마들을 보며 살며시 미소 짓지요. 이제 꼬마들처럼 하기에는 너무 커버린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면서 내적 본능을 대신 충족합니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밤에 살짝 시도해 보는 어른도 있지 않을까요.
나무에 달려있어도 예쁘고, 바닥에 떨어져도 아름다운 것이 낙엽이지 않을까 합니다.
어떻게 해도 아름답다니, 참 부럽습니다. 자연은 계절을 따라가는 모습 하나하나가 다 예쁘다는 아주 강력한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종 그 과정에는 떨어짐이 수반되곤 합니다. 봄에는 꽃이 피었다 떨어지지요. 철쭉까지 모두 떨어지고 나면 여름이 옵니다. 가을에는 낙엽이 물들었다 떨어집니다. 대부분의 나무가 나목이 되면 겨울이 옵니다. 아, 엽록소의 초록색이 아닌 것들은 생성되었다 떨어지게 되는군요. 필요에 따라 더해졌다가 필요에 따라 덜어내 집니다. 그러면서 시간을 지내고, 계절을 통과하며, 시절을 보냅니다.
때가 되면 차올랐다가
때가 되면 비워냅니다
그래서 나무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위안이 되며, 때로는 휴식 또는 안식을 위한 공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나무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계절, 싫어하는 계절은 있어도 나무를 싫어한다는 것은 드물다는 사실을 오늘 깨닫습니다. 그런 면에서도 참 부럽습니다.
나무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러합니다. 두꺼운 외피로 몸을 감싸고 여리디 여린 잎으로 자연을 흡수하며, 때가 되면 그때에 해야 할 것을 말없이 해내고, 조금 늦거나 이르더라도 비난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가끔 나무에 몹쓸 짓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항상 그 자리에 있어도 괜찮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오면 흘려보내고, 어떤 존재들에게 위안과 휴식이 되는 그런 무언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한강 작가님의 채식주의자 3부작에 나오는 주인공도 나무가 되고 싶어 합니다. 저와는 사뭇 다른(아니, 차원이 다른) 이유로 나무가 되고 싶어 하지만, 나무가 되고 싶다는 그 마음 자체는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녀가 나무가 되기 원하는 것은 너무나도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지만, 깊게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시선과 사회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을 겁니다. 그저 원래의 나 그대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괜찮기를 바랐을 겁니다. 때가 되면 비워지기를 원했을 겁니다. 나무가 꽃과 낙엽을 떨어뜨리듯이.
직장인들에게 연말은 다양한 이벤트가 있는 시기입니다. 잔뜩 욕심이 나는 때이기도 하고, 어쩌면 많은 것을 덜어내고 싶어지는 때이기도 하지요.
덜어내도 주변의 시선에서 괜찮을 수 있는 존재가 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인간은 오롯이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만큼,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는 것 또한 매우 어려운 숙제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있는 어떤 작은 빛이 따스한 온기를 주는 하루가 되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