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교적 말 잘 듣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엄마가 하지 말라는 것은 일체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논수로에서 멱을 감는 것도
일체 하지 않았다.
엄마가 위험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이런 범생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180도 바뀌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시를 쓰고 소설을 탐독하면서
내적으로 반항심을 키워간 것 같다.
문학은 기존 것을 뒤집어야 할 수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가치관을 따르면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질풍노도의 사고를 치거나
방황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들이 당연하다고 하는 것에 대한 의심을 하고
부정하려는 사고의 사춘기를 심하게 겪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중3 때 집을 나와 하숙을 했는데
그 집 딸이 나보다 1년 선배인 누나였다.
밤새 책을 읽느라 늦잠을 깨우는 것도 누나가 했고,
식사 시간을 알리는 것도 누나였다.
드라마에 단골 메뉴로 나오는 것처럼
그 누나는 ‘예쁜 누나’였다.
처음엔 “학생!”이라고 부르다가
누나와 잠깐 이야기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누나는 “야, 너 후배니까 이름 부르고 말 놓을게”했다.
나로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그 누나가 편한대로 하는 게 나도 좋았다.
겁도 없이 중3 때부터 신춘문예에 도전했다.
낙방했지만
그것조차 자랑거리였다.
교과서보다 시집이나 소설책이 더 친했다.
중3 담임이 성적이 계속 떨어지자
드디어 면담을 하자고 했다.
교무실에 끌려 갔지만
특별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선생님을 교묘하게 속였기 때문이다.
시를 쓴다거나 소설을 시도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때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쓴다고 했으면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지방의 명문고를 지망하지 않고
당시 학생들을 상대로 출판되던 ‘학원’지에 나온
고등학교 사진이 그럴듯해서 지원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하라는 공부를 멀리하고
오직 도서관에 있는 문학 전집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정말 닥치는 대로 읽었다.
문예반 지도 선생님이
“너는 서울대 국문과 학생보다 많이 읽는구나”라고 할 정도였다.
공부해야 할 학생이 매일 시를 쓰고
안 되면 소설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8번의 신춘문예 낙방을 했다.
신춘문예가 내 인생의 전부였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그룹 건설사도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다시 시험을 보고 들어간 곳이
식품회사 카피라이터였다.
거기서 히트 카피를 쓰면서
광고 시장에서 스카우트 대상이 되어
광고대행사의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사실 대학 재학중에 건설사 취업이 된 것은
당시 대한민국 경제 상황으로 봐서
대단한 성공이었다.
그런데 그걸 박차고 나가
다시 취업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것이 나 다운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늘 비주류의 삶을 추구했던 것 같다.
온전하게 갈 수 있는 길도
돌아서 간 경우가 대단히 많다.
어쩌면 내가 처음 글을 쓰고
백일장에 당선이 되고 하던 시절부터
나는 비판적 사고를 키우고 있었던 것 같다.
글 쓰는 사람이 어떻게 시류에 영합하겠는가?
아무튼 나는 변화의 길목에서
늘 금지된 것을 보고 흥분하고
그 길을 택했던 것 같다.
남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내 스스로의 삶을 묵묵히 걸어온 것 같다.
때론 고달프지만
그렇게 뚜벅뚜벅 오늘까지 걸어온 것이다.
왜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가냐고 하는 사람들이 말하지만
그것은 내가 살아오면서 쌓아온 DNA의 결과 값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을 즐기고
오늘을 사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이 쌓여 내일이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