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오늘처럼 아카시아 향이 살살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고,
소쩍새가 우는 초여름 밤이었다.
잠에 들지 못하고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했다.
주로는 이런저런 상상이었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지어내는 일이었다.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이야기가 끝을 향해 갈 때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에 내가 마침표를 찍으면, 나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이 재미없는 세상에 갇혀서 살게 되는 것인가.'
무슨 엉뚱한 상상인가 싶지만, 당시에 나는 꽤 심각했다.
사실, 영화를 보아도 드라마를 보아도 책을 읽어도, 나는 꽉 닫힌 결말에 거부감이 들었다.
이 주인공들은 매번 이 꽉 닫힌 결말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일 텐데, 그렇다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같은 시간을 몇 번이고 살아낸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행복한 기억에 갇히는 것도, 슬픈 기억 속에 갇히는 것도 나에게는 모두 같은 불행의 강도로 보였다.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은 평생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마침표가 아닌 물음표나 느낌표나 혹은 쉼표 같은 것들로 그들이 이야기 속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주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인정하기 싫지만) 필연적으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이야기'와 '다큐멘터리'는 어딘지 닮았다.
나에게 이야기는 삶이다.
그 이야기에는 기/승/전/결 같은 법칙보다도 더 우선하는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살아내야 한다.'라는 것이다.
어떠한 극적인 이야기도, '살아가며 살아내야 한다'는 원칙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는 이 원칙을 무엇보다도 잘 보여주며, 느끼게 해 주었다.
내가 기록하는 모든 이야기가 '삶'이라는 것이고, 그 삶은 언제나 변하며, 언제나 나의 예측 바깥에서 온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여름, 기록>은 어떤 영화가 될까.
어제도 영화를 편집하는 꿈을 꾸었다.
이야기를 제대로 만들지 못해 엉엉 우는 꿈을 꾸었다.
<여름, 기록>에 나오는 여성들은 사라졌거나 죽었다.
그녀들의 사라짐과 죽음을 목격하면서도 나는 끝끝내 살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증언해야 한다.
다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렇지만, 나는 부끄럽더라도 그녀들의 이야기 앞에 서야 한다.
또한, 그녀들의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 시간에 갇히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누군가의 기억으로 전해지기 위해, 반드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숨어서 보이지 않았던 아카시아 나무에 하얀 꽃들이 주렁주렁 달리고, 은은하게 향이 퍼진다.
<여름, 기록>에서 떠올린 여성들의 이름들과 그녀들의 이야기들이 누군가에게 가닿아 하나의 시간과 기억으로 자리 잡길 바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나는 지난날의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눈앞에 내어놓고, 두고두고 바라보며 그 감정들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살아내길 바란다.
영화 한 편으로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길, 이 영화는 그저 그 무거움을 두고두고 기억하는 하나의 기록이 되길 바라며.
여름이 되면, 멀리에서도 코 끝에 아른거리는 아카시아 향처럼.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순간 이 영화가 나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