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한라산.
학창시절 배웠던 한반도의 남쪽에서 가장 높은 산.
제주에서 살아보니 한라산은 단순히 높은 산이 아닌
제주의 생태계와 도민들의 생활 전반에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제주 토박이 삼춘들은 흔히 한라산을 ‘제주 할망’이라 부른다.
날씨가 좋아 한라산 정상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날이면
길을 지나가다가도 멈춰서 한라산 정상 부분을 유심히 보게 된다.
한참 보고 있으면 정말 정상 부분의 윤곽이
마치 굴곡진 인생을 억척스럽게 살아온 할머니의 얼굴 형상으로 보인다.
좁은 이마에 움푹 들어간 눈가. 야윈 콧날의 아래 약간은 도톰한 입술과 조금은 날카로와 보이는 턱선까지.
지금의 얼굴 묘사는 한라산 정남쪽 아래인 서귀포에서 올려다 본 모습을 설명한 것이고,
그 모습이 북쪽인 제주시 쪽에서 보거나 동쪽이나 서쪽에서 봤을 땐 약간씩 차이가 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시작하면, 제주에는 고사리 장마라는 짧은 우기가 있다.
여름 장마처럼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는 건 아니지만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가 짧게는 3~4일 길게는 보름 정도씩 내리기도 한다.
서귀포 농부들이 귤 수확철 다음으로 바쁜 시기가 바로 이때다.
이른 새볔. 동이 트기도 전에 장화를 신고, 꺽은 고사리를 담을 포대를 메고,
삼삼오오 차를 타고 한라산을 오른다.
해가 뜨고 날이 밝아지면, 한라산 중턱에는 고사리를 꺾으러 온 도민들과 육지에서 원정 내려온 사람들로
여기저기 쉴 틈 없이 머리가 보였다 안보였다를 반복하며 지천에 올라온 고사리들이 꺾어진다.
하나 꺾으면 바로 앞에 또 다른 고사리가 있고, 또 있고 그렇게 눈 압에 고사리를 꺾으며 가다 보면
어느새 능선 하나를 넘곤 한다.
그렇게 반나절 쌀 한 포대만큼 고사리를 꺾고 내려갈 때면
한라산 정상 쪽으로 허리를 굽혀 크게 인사를 한다. ‘할망, 무사히 잘 꺾고 갑니다.’
겨울이면 눈 구경을 하러 한라산을 한 번씩 오를 때도
탐방로 입구에서 아이젠을 등산화에 끼우며
‘할망, 일행들 모두 무사히 다녀올 수 있도록 살펴 줍서게’ 하고 인사를 드리고
하산해서 내려와서도 무사히 내려온 감사함에 인사를 드리곤 한다.
안개가 많이 끼거나 눈이 쌓여 미끄러운 날에 5.16 도로를 타고 한라산을 넘을 일이 있어도
할망산에 인사를 드린다.
동이 트는 아침부터 날씨가 좋아 한라산 정상이 잘 보이면 왠지 할망 얼굴이 웃는 것 같아 보이고,
날이 궃어 정상이 구름에 가려 보였다 안 보였다 하면 할망 얼굴이 찡그린 것처럼 보인다.
더운 여름날 지는 태양에 비치는 할망 얼굴은 뜨거운 태양 아래 힘들게 밭을 매고 오신 지친 얼굴로 보인다.
밤새 눈이 내려 한라산에 수북이 눈이 쌓이면, 곱게 화장하고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할망 얼굴로 보인다.
제주도에 한 번씩 놀러 온 사람들은 답답한 듯 볼멘소리를 하곤 한다.
‘한라산에도 설악산처럼 케이블 카를 놓으면 훨씬 편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 갈 텐데...’
‘3월까지 눈이 녹지 않는 한라산 정상 부근에 스키장을 만들면 해외에서도 스키투어를 올 텐데...'
편하고 돈벌이 잘 될 거란 걸 제주도 사람들도 다 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다른 것도 알고 있다.
한라산은 등산이나 즐기는 평범한 산만이 아닌 할머니와 같은 존재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