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있는 한라산을 보면서
동네 뒷동산을 오르듯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산을 좋아하는 나의 경우도 2년 동안 한라산을 5번 올랐지만 백록담은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한라산을 오르려면 우선 날씨가 허락해 주어야 한다.
여름은 더워서 정상까지 가기에는 힘들고, 다른 계절에도 아래쪽은 날이 좋아도
중산간 위쪽으로는 비와 눈이 자주 오기 때문에 오를 수 있는 날이 그렇게 많지 않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한라산은 겨울에 오르는 게 좋다.
오르막 계단도 눈에 덮여 아이젠을 신으면 오히려 다니기 편하고,
서귀포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눈꽃 사이를 걷다 보면 광활히 펼쳐져 있는 눈 덮인 한라산이 정말 아름답다.
작년에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TV 드라마가 방영됐었는데, 배경이 제주도여서 한 회도 놓치지 않고 시청했다.
제주가 고향인 엄마(김혜자)가 죽기 전에 한라산에 오르고 싶다는 말에
아들(이병헌)이 엄마를 등에 엎고 눈 덮인 한라산을 올라가는 장면이 있었다.
드라마를 보던 많은 시청자들이 눈물을 흘렸던 그 장면 때문일까,
‘우리들의 블루스’ 방영 이후 부모님을 모시고 한라산을 오르는 자녀들이 많아졌다고 들었다.
서귀포에서 한라산을 오르는 코스는
크게 '성판악'에서 출발하는 길과 '영실'과 '어리목 탐방로'를 이용할 수 있다.
부모님과 함께 오르기에는 어리목 탐방로가 상대적으로 평이하다.
74세인 우리 엄마도 더 늦기 전에 한라산을 구경시켜 드려야겠다는 계획을 지난 겨울 실행해 보았다.
눈이 녹기 전인 지난 2월, 48세 아들은 74세의 두 엄마(제주에 내려와 계신 엄마의 친구분까지)를 모시고
한라산을 올랐다.
정상까지 가야 한다는 목표는 없었고, 엄마들이 오를 수 있는 최대치까지라도 모시고 가고 싶었다.
남벽분기점까지는 힘들 것이고, 내심 윗세오름 쉼터 눈밭에 앉아 컵라면을 드실 수 있기를 기대해 보았다.
출발 전에 등산복과 등산화, 아이젠을 챙기고 초콜릿과 양갱, 귤과 과자
그리고 그녀들이 꼭 맛봐야 하는 컵라면과 뜨거운 물도 챙겼다.
이른 새벽, 그녀들을 뒷 좌석에 모시고 차를 몰아 눈 덮인 중산간 도로를 달렸다.
백발의 그녀들은 아직 한라산 문턱에도 들어서지 않았지만
눈 덮인 도로를 달리는 것에도 소녀들처럼 좋아하셨다.
그렇게 들뜬 기분으로 어리목 분기점에 도착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그녀들의 발에 아이젠을 신겨 드렸다.
아이젠을 신고 탐방로 입구의 눈을 밟은 순간부터 그녀들은 한라산 정상을 오른 것처럼 좋아하셨다.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들 신나 하셔서 내심 걱정도 됐지만
그녀들의 표정엔 백록담이라도 보고 오겠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렇게 힘차게 출발한 지 30분이 지나자 그녀들은 슬슬 주저앉기 시작했다.
처음의 호기로움도 덥다며 벗어 던진 패딩처럼 구겨졌고
여고생 같았던 얼굴도 점점 늙은 할머니의 얼굴로 돌아왔다.
어리목 코스가 원래 처음 한 시간이 가장 경사가 심한 오르막 구간이라
그 고비만 잘 넘기면 나머지 길은 경사가 완만해서 쉽게 갈 수 있을 텐데,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일단 코스 설명을 간략히 드리고, 천천히 걷고 자주 쉬면서 2시간을 걸려 힘든 구간을 올랐다.
그렇게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1.9km를 올라 사제비 동산에 도착했다.
사제비 동산에만 올라도 발아래 구름이 보이고, 눈 덮인 드넓은 한라산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렇게 눈밭에 앉아 따뜻한 커피와 시원한 귤로 당충전을 시켜드리고, 만세동산까지 전진했다.
만세동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제주를 그녀들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정성 들여 눈에 담았다.
좋다고 하는 해외 관광지를 숱하게 다녔겠지만, 이렇게 힘들게 올라온 곳은 처음이어서 일까.
알프스 만년설보다 더 귀하고 예쁜 한라산 눈꽃을 조심스레 만져보는 그녀들의 얼굴엔
다시 여고생 소녀의 웃음이 묻어났다.
아쉽게도 그녀들의 도전은 거기까지였다.
윗세오름까지 가기에는 그녀들의 체력이 안될 것 같았고
이미 그녀들의 표정엔 ‘만족’이라는 두 글자가 보였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하산길에 한라산 최고의 만찬 설익은 컵라면을 해드렸다.
평소 라면을 즐겨하지 않으시는 두 분 모두 평생 동안 먹어 본 라면 중에 가장 맛있다며
국물까지 남김없이 완컵 하셨다.
그렇게 그녀들의 도전은 1500 고지에서 마쳤지만, 인생은 80부터 라고 했던가.
아직 그녀의 한라산 등반기는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