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해외여행 동안 현지음식이 물릴 때쯤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으로 찾게 되는 음식. 물론 개인차가 있긴 하겠지만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이 첫 번째로 꼽으라면 이 음식. 김치찌개가 아닐 듯싶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다른 밑반찬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 최고의 밥도둑 김치찌개. 나 어릴 적 80년대까지만 해도 굵은 멸치를 넣고 신김치를 큼직하게 썰어 끓인 멸치 김치찌개가 대부분이었다. 기름기 없이 담백하고 칼칼한 국물에 뜨거운 흰쌀밥이면 한 끼 식사로 충분했던 그 시절. 저녁 식사 시간이면 동네 이 집 저 집에서 익숙하게 풍겨왔던 멸치 김치찌개 끓이는 냄새는 지금까지 나의 어린 시절 향수를 자극한다. 어릴 적 찌개 안의 멸치가 너무 커 보여서 찌개 깊숙이 밀어 넣고 먹었던 기억 때문일까,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나는 김치찌개 안에 들어있는 멸치는 먹지 않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먹거리가 풍족해진 90년대. 김치찌개의 맛을 더해주는 메인 재료들이 다양해졌다. 비개가 제법 붙은 돼지 앞다리 살을 듬성듬성 썰어 기름을 두르고 신김치와 달달 볶다가 김치국물과 물을 넣고 푹 끓여 낸 돼지고기 김치찌개. 통조림 참치가 처음 시판되고 얼마 되지 않아 참치 김치찌개 또한 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스팸 통조림을 넣은 김치찌개 역시 소시지를 먹고 자란 세대들의 입맛을 저격하면서 다른 자리를 꿰찼다. 이렇게 다양해지는 김치찌개들 사이에서 원조격인 멸치 김치찌개는 점점 그 자리가 좁아졌다.
“김치만 맛있으면 찌개 맛은 보장된다.”는 말은 옛날 사람들의 말이 되어버렸고, 김치찌개에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취향대로 먹을 수 있는 새로운 트렌드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하루에도 여러 잔 먹게 되는 커피나 밥 대신 먹게 되는 빵을 비롯한 다양한 먹거리들로 하루를 보내게 되면, 속이 더부룩하고 배는 부르지만 왠지 모를 허기가 밀려올 때가 있다. 그런 공복감이 들 때면 몸에서 뿐만 아니라 마음 한구석도 서늘함이 느껴지기 십상이다. 이런 밤에 가장 생각나는 음식이 나에게는 멸치 김치찌개이다. 맛있는 한돈 앞다리 살이나 참치 통조림은 필요하지 않다. 필요한 건 오직 맛있게 익은 김장김치와 굵은 멸치. 조금의 호사를 부려 본다면 따끈한 흰쌀밥에 막 구운 맨 김과 짭조름한 양념장. 이 조합이면 힘들었던 일상으로 고생한 나의 위장과 마음에 충분한 보상을 해줄 수 있다. 어린 시절 단출하게 김치찌개와 김이 올려져 있던 작은 양은 밥상 주위로 흥부네 가족처럼 둘러앉아 먹었던 그때의 그 맛을 소환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엄마가 끓여주신 투박한 김치찌개는 그때의 행복했던 시간을 떠오르게 해 준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요즈음. 마음이 허기 질 때면 늘 생각나는 김치찌개의 맛은 다른 어떤 값비싼 음식과도 견줄 수 없다. 칼칼한 김치찌개에 소주 한잔이 맛있는 오늘밤. 소소한 행복에 취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