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음식을 경험해 본 외국인들이 생각할 때 한국음식 하면 떠오르는 독특한 맛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들에게 생소한 고추장, 된장, 간장 같은 특별한 소스가 아닐까? 우리에겐 물처럼 매일 접하는 맛이지만, 생소한 장맛이 그들에겐 한국음식의 첫맛으로 기억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사람인 나에게 케첩과 마요네즈는 서양음식의 첫맛이었다.
내가 처음 먹어 본 서양음식은 햅버거와 감자튀김이었다. 처음 보는 두꺼운 빵 사이에 야채와 고기가 그 틈 사이로는 케첩과 마요네즈가 듬뿍 뿌려져 있었다. 작은 입을 힘껏 벌려 두꺼운 햄버거를 한 번에 베어 먹었을 때 느꼈던 짭조름하면서 시큼하고 달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뜨거운 감자튀김을 케첩에 찍어 먹었던 기억도 내 머릿속 행복 저장소에 간직되어 있다. 햄버거에서 돈까스로 돈까스에서 피자로 피자에서 파스타까지 서양음식의 변천사는 시간의 순서대로 다양해졌지만, 일관되게 느껴지는 맛은 케첩과 마요네즈의 맛이었다. 요리를 전혀 알지 못했던 학창 시절 그저 서양음식이라면 자주 먹지 못하는 맛있는 음식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맛있긴 했지만 배부르게 먹고 나서도 왠지 모르게 속이 허했던 느낌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걸 보면 나는 뼛속까지 토종 입맛임이 확실하다. 그렇게 조금은 부족했던 서양음식들 중에서 처음으로 속이 편했던 것이 토마토 스튜와 메쉬 포테이토였다.
지금도 유통이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시레이션’이라는 일종의 미군 전투식량을 도깨비 시장 등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호기심이 많으셨던 당시의 아버지께서는 월급날이면 한 번씩 남대문 시장에 가서 시레이션을 사가지고 오셨었다. 종이박스를 뜯으면 여러 크기의 국방색 통조림과 3분 카레 같은 용기에 다양한 질감들의 먹을 것들이 어린 동생과 나에겐 뜯지 않은 크리스마스 선물 같았다. 영어를 알지 못했던 그때. 뜯어보지 않으면 어떤 음식이 들어있을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설렘과 궁금함은 음식맛의 기대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마침내 통조림을 뜯어보면 낯선 모양의 소시지부터 고기완자, 절인과일, 주스도 들어 있었고 비닐로 포장된 것들의 절취선을 잘라보면 흰색의 고소한 치즈부터 비스킷과 딱딱한 빵과 잼, 카레나 처음 보는 소스류처럼 신기한 서양음식들이 나왔다. 언박싱의 설렘을 제대로 느꼈던 그때 처음 맛보았던 음식이 토마토 스튜였다. 꽤나 큰 통조림 안에 시뻘건 국물이 가득 들어있었던 첫 느낌. 시큼한 냄새가 나서 혹시나 쉬어 버린 게 아니냐며 아버지에게 타박을 했던 엄마는 본능적으로 시뻘건 국물을 냄비에 붓고 데우기 시작하셨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나자 꽤나 맛있는 냄새가 났던 빨간 국물은 나에게 또 다른 케첩의 맛을 알려 주었다. 서양음식으로 국물요리는 돈까스를 시키면 따라 나오는 크림수프뿐이었는데 처음 보는 빨간 국물은 느끼하지 않고 시큼하지만 개운하고, 고기나 감자, 토마토가 씹혀서 든든하기도 했다. 그렇게 토마토 스튜는 나에게 맛있고 든든한 음식으로 기억되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몸이 지치거나 몸살기운이 들 때 서양음식이 생각나면 토마토 스튜를 만들어 먹는다.
필요한 재료는 돼지고기 목살, 감자, 양파, 당근, 토마토, 셀러리 약간, 시판용 토마토소스 한 병과 치킨스톡이다. 카레를 만들 때와 같이 재료들을 깍둑썰기해서 준비한다. 기름을 두른 냄비에 목살과 감자, 당근을 볶다가 버터 약간과 양파를 넣고 조금 더 볶아준다. 재료가 눌어붙지 않도록 물을 조금 부어주고 토마토소스 한 병을 붓고 나무주걱으로 저어준다. 스튜가 서서히 끓으면 불을 줄이고 껍질 벗긴 토마토를 듬성듬성 썰어 넣어주고, 셀러리를 채 썰어 뿌려준다. 이때 좋아하는 허브나 파슬리 가루를 넣어주어도 좋다. 약한 불로 천천히 졸여 주면서 치킨스톡으로 간을 하면 든든하고 따뜻한 최애 서양음식 토마토 스튜가 완성된다. 한 냄비 끓여놓고 국처럼 먹어도 좋고, 좋아하는 파스타면을 삶아 토마토 파스타를 만들어 먹어도 맛있다.
두 번째 메뉴인 메쉬포테이토를 내가 처음 맛본 건 훼미리 레스토랑이 한창 인기가 좋을 무렵이었다. 처음 먹어보는 큼지막한 스테이크를 주문하니 밥 대신 으깬 감자가 함께 나왔다. 여태껏 먹어보았던 어떤 감자보다도 부드러웠던 메쉬포테이토. 고기를 먹고 난 후 먹으니 느끼한 맛도 가시고 뻑뻑하지 않은 부드러운 식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부드러운 감자요리가 생각날 때 나는 좀 더 활용도가 좋은 감자샐러드를 만들어 먹는다.
포실한 감자는 푹 삶는다. 계란도 감자와 비슷한 비율로 함께 삶는다. 삶은 감자는 커다란 볼에 넣고 으깨준다. 이때 약간의 소금과 후추를 넣어준다. 삶은 계란은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해서 흰자는 칼로 잘게 다져준다. 오이와 양파는 얇게 어슷 썰어 소금물에 잠깐 절여두었다가 물기를 꽉 짜준다. 기호에 따라 사과나 감 등 딱딱한 과일을 다져서 준비해 두면 더 좋다. 으깬 감자와 다진 계란 흰자, 야채와 과일을 볼에 넣고 마요네즈를 듬뿍 넣어주고, 설탕을 약간 뿌려준다. 위생장갑을 끼고 조물조물 잘 비벼준다. 큰 접시에 케익처럼 틀을 잡아 예쁘게 담고 계란 노른자를 체에 바쳐 노란 가루를 샐러드에 뿌려보자. 먹기에도 아까운 예쁜 감자샐러드가 완성된다. 물론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한 건 당연하다. 그냥 먹어도 좋지만 식빵 속에 듬뿍 발라 샌드위치로 만들 수 있고, 크래커에 발라 먹어도 맛있다. 날씨 좋은 봄날. 야외 나들이 갈 때나 손님들이 오는 파티음식에 내놓아도 근사한 요리처럼 보인다.
매일 먹는 한식이 지겨울 때쯤 서양음식의 맛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두 메뉴를 만들어 보자. 특별한 맛과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