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 당시 기적적인 성과를 일궈낸 히딩크 감독은 모든 선수들에게 멀티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도록 주문했다고 한다. 강인한 체력과 다양한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훈련에 매진한 선수들은 놀라운 성적으로 국민들을 감동시켰고, 그 여운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음식에도 멀티가 가능한 음식들이 있다. 식사로도 맛있고, 술안주로도 잘 어울리는 음식. 물론 “맛없는 음식은 있어도 맛없는 술안주는 없다.”라고 피력한 권여선 작가님처럼 모든 음식은 안주가 될 수 있다는 의견에 토를 다는 건 절대 아니다. 나는 권 작가님의 “오늘 뭐 먹지?”를 읽고 난 후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매일 맛있게 먹는 음식으로도 이렇게 맛깔나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고, 글쓰기의 문턱이 조금은 낮아진 게 큰 위안이 되었다.
아무튼 수많은 멀티 음식들 중에서 나의 원픽은 순대국밥이다. 먹는 방법에 따라 술안주와 식사로 구분 지을 수 있는 음식. 술을 마실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한 경우, 모듬순대 한 접시를 주문해서 생양파와 부추무침을 곁들여 가볍게 소주 한잔 마시다 보면 국물이 생각나게 된다. 그때 술국이나 따로국밥을 추가로 주문해서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면 맛있고 푸짐한 술안주가 된다. 간단히 식사하면서 반주가 생각날 땐 순대국밥을 주문한다. 막걸리나 소주 한 병을 놓고 국밥 안의 머리고기, 간, 귀때기, 내장과 순대를 새우젓에 찍어 술안주로 먹으면서 간간히 국밥 한 수저 크게 떠서 깍두기를 올려 먹으면 든든한 식사가 되는 음식이 순대국밥이다. 구수한 돼지 국물이 좋으면 들개가루와 후추를 추가해서 먹으면 오리지널 맛. 좀 더 칼칼하고 매콤하게 먹고 싶다면 청양고추와 다대기를 풀어서 매운맛을 즐길 수 있는 멀티 음식계의 최고봉. 순대국밥. 예전에는 주로 재래시장이나 역전 근처에서 주로 볼 수 있었던 순대국밥 집들이 요즈음은 체인화되고 대형화되면서 조금은 대중적으로 맛이 바뀌어 가고 있다. 원래의 순대국밥이라 함은 돼지 특유의 쿵큼한 잡내도 살짝 나고 돼지의 온갖 부속 내장들이 함께 들어간 진한 국물에 약간의 밥이 말아져 나오는 다소 투박하고 어른들의 맛으로 분류되었던 음식이었다. 하지만 요즈음 도시의 순대국밥 집들의 국밥은 잡내를 없애고, 냄새가 적은 내장과 살코기를 넣은 기름기를 뺀 뽀얀 국물에 밥도 따로 나오는 게 보통이다. 이 맛이 순대국밥의 맛이라고 각인된 세대들은 이 맛이 입에 맞을 것이다. 하지만 재래시장의 커다란 솥 안에서 돼지 잡내를 풍겨가며 온갖 내장들을 썰어 넣고 인심 좋게 말아 뚝배기에 토렴 한 국밥을 먹고 자란 아재들에겐 요즈음의 도시 순대국밥 맛은 아쉬움이라 표현하고 싶다.
하지만 돼지에 진심인 제주도에 오게 되면서 그런 아쉬움은 사라졌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처음 맛보았던 순대국밥의 첫 기억. 그 맛을 서귀포에서 맛볼 수 있었다. 인간의 혀는 위대하다. 성석재 작가님은 음식맛은 우리 각자가 기억하지 못하던 때에 각인된다고 했다. 기억이 안나는 다섯 살 때 먹은 음식이 학교 가서 먹은 급식보다 더 본질에 가깝다고. 맛있다는 게 본질적인 건 아니라고 표현했다. 성 작가님의 말처럼 40년이 지난 그때의 첫맛을 내 혀는 기억하고 있었다. 서귀포 오일장의 ‘놀부네’가 그 맛을 되살려 주었다. 오일에 한번 장사하는 오일장 안에 위치해 있고, 옛날식 순대국밥이다. 돼지 냄새가 조금은 나는 진한 국물에 푸짐한 건더기 밑으로 밥이 말아져 나온다. ‘놀부네’의 순대국밥 맛은 설명하고 싶지 않다. 순대국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방문해서 먹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주의할 점은 테이블마다 놓인 청양고추를 함부로 먹어선 안된다. 특히나 여름철에 무심코 땡초를 먹으면, 물 이외의 다른 음식을 먹지 못할 정도로 매운 고추들이 있다. 저녁 장사는 하지 않으므로 늦어도 해 떨어지기 전에 가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차를 운전하지 않아도 된다면 제주 막걸리와 함께 드셔 보시길, 도시화된 국밥 맛이 아쉬웠던 분들이라면 분명히 만족할 것이다. 오일장이 서는 날은 매달 끝자리 날수가 4일, 9일로 끝나는 날이다.
오일장을 맞추기 힘든 분들은 오일장 근처의 ‘순대 이야기’도 서귀포 도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내가 살아본 서귀포의 돼지 국물 음식들은 대부분 훌륭했다. 적어도 개량화된 국밥의 맛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