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서일까? 새로운 음식맛보다는 익숙한 맛을 더 찾게 되는 게 요즈음의 나다.
더욱이 아주 오래전 먹었던 음식의 첫맛을 다시 맛보고 싶은 건 단순한 추억팔이 일까? 요즘처럼 바람 부는 추운 계절이 오면 더욱 그러하다.
술꾼들 중에서도 독주를 즐기는 부류들이 있다. 평소엔 소주나 맥주를 즐기더라도 한 번씩 목에서 시작해 위쪽 내장부터 아래쪽 까지 뜨끈함이 느껴지도록 짜릿하게 독한 맛. 그 뜨끈함이 생각날 때가 있다.
중국요리를 청요리라 부르고, 고량주를 빼갈이라 부르던 시절. 술맛은 몰랐지만 호기로움이 넘치던 그 시절에 젊음은 독주를 원샷했었다. 생양파를 춘장에 찍어서 한잔. 짬뽕국물에 또 한잔. 그렇게 고량주를 마시다 보면 술이 물 같고, 물이 술 같았다.
고량주는 독하다. 알코올 도수는 위스키와 비슷하지만, 특유의 향이 있고, 얼음을 넣지 않고 원액으로 마시다 보니 다음날이면 속에 탈이 난다. 요즈음은 연태고량에 탄산수를 섞어 하이볼도 만들어 마시지만, 개인적인 취향은 고량주는 작은 잔에 따라 한입에 털어 넣는 게 맛있다.
그 시절 그만큼은 아니지만, 아주 가끔 고량주가 생각날 때 가는 맛집이 있다.
서귀포 동홍동에 위치한 “천외천”. 일반 동네에 위치한 평범한 중국집이다. 짜장면과 짬뽕 모두 수타로 면을 뽑는다.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좋아 점심시간이면 홀에는 늘 만석이다. 배달도 하기 때문에 홀이 크진 않지만 오래된 중국집에서 주문을 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마치 젊은 시절 그때로 돌아간 것 같다. 손님이 몰리기 전, 늦은 오후 천외천에 가서 “알뜰세트”를 시킨다. 1인당 15,000원을 내면 당일 주방장 마음대로 청요리 3가지를 해준다. 기본이 3인분부터 주문 가능하다. 모든 메뉴를 시키면 단무지와 생양파, 춘장 그리고 짜장소스가 먼저 나온다. 옛날방식이다. 예전에 중국집에 가서 요리를 시키면 짜장소스가 먼저 나왔었다. 요리가 나오기 전 고량주 한잔에 생양파에 짜장소스를 찍어먹던 그때의 그 느낌.
탕수육, 고추잡채, 누룽지탕 어느 날엔 깐풍기, 유산슬, 팔보채 이름만 들어도 침이 고이는 달콤한 청요리 3가지가 랜덤으로 나온다. 언제부턴가 일반 고량주 자리를 연태고량이 차지해서 술값이 만만치 않지만 자주 먹지 못하고, 일 년에 한두 번 먹게 되는 이 자리에 술값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중학생 시절. 아버지를 따라 처음 먹어보았던 난자완스에 고량주 한잔을 맛나게 드셨던 그분의 나이가 훌쩍 넘어버린 내가 그분처럼 청요리에 고량주를 털어 넣는다. 음식 종류에 따라 어울리는 주종들이 있지만, 특히나 고량주는 중국음식과 함께 마셔야 풍미가 산다. 소주와 달리 한병 이상 마시면 위험하다는 걸 알기에 안주는 많이 고량주는 조금씩 아껴 마시게 된다. 자주가지 못해서 천외천의 모든 메뉴를 먹어보진 못했다. 하지만, 15,000원으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미식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요리를 어느 정도 먹었다면 흑돼지 짜장과 바당 짬뽕을 시켜 지인들과 나누어 먹는 것으로 식사까지 깔끔히 해결할 수 있는 맛집이다.
두 번째 맛집은 서귀포 서문로에 위치한 “천일만두”. 이곳 역시 중국집이다. 보통의 중국집과는 달리 짜장과 짬뽕을 팔지 않는다. 군만두, 찐만두, 만둣국과 가지튀김, 토마토 계란볶음, 지삼선, 소고기 볶음 등 중국인들이 주로 먹는 음식을 파는 곳으로 중국인들이 운영하고 있다. 도민들과 관광객들이 모두 찾는 곳으로 언제 가도 손님들이 항상 많다. 만두 종류는 모두 맛있고, 요리도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식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입에 맞을 것이다.
이곳에 가면 나는 군만두와 토마토 계란볶음이나 가지튀김, 볶음밥을 시켜 고량주를 마신다. 같은 중국음식이지만 천외천과는 다른 느낌의 안주다. 소스 맛보다는 불맛과 기본에 충실한 맛으로 자극적이지 않고 슴슴한 청요리를 즐길 수 있다. 고량주를 못 드시는 분이라면 칭다오 맥주와도 잘 어울리는 맛이다.
세상엔 맛있는 음식도 많고 다양한 술들도 많다.
매일 먹는 음식이 지겨워질 때쯤, 어쩌다 한번 쉽게 접하지 않는 안주에 고량주를 마셔보자. 좋은 사람들과 새로운 추억을 남길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