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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음식일기 05화

여름을 이기는 맛(자리 물회, 콩국수)

by 고작가

서귀포의 여름은 길다. 육지의 여름은 6월 중순부터 8월 말이면 끝나지만, 섬의 여름은 훨씬 길고 습하다. 현장일을 시작하고 올 해가 3번째 맞는 여름이지만, 현장에서의 무더위는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다. 가장 무더운 초복부터 말복 사이엔 야외 현장일을 미루기도 하고 동이 트는 새벽에 일을 시작해서 오후 2~3시경에 마쳐보기도 하지만, 서귀포의 무더위와 싸우기엔 역부족인 것 같다.

이른 새벽. 현장에 도착해서 작업을 시작하면 오전 10시가 넘어갈 쯤, 작업복은 땀에 흠뻑 젖어 축축해지고, 몸은 지치고 머리는 멍해진다. 11시쯤이면 점심식사를 하는데 이 또한 고역이다.

한껏 뜨거워진 몸으로 따뜻한 음식을 먹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건 경험해 본 이들은 알 것이다. 배고픔도 느낄 수 없는 멍한 상태에서 오후 일을 하기 위해 억지로 점심을 먹다 보면 음식 맛도 없지만 속도 많이 불편해진다.

우리 같은 현장일을 하는 노동자들도 그렇지만, 밭에서 일을 하다 온 농부들도 마찬가지다 보니 여름이면 도민들이 다니는 식당에선 횟집이 아니어도 자리물회와 콩국수를 많이들 판다.

자리물회는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으로 자리라 불리는 작은 생선을 뼈채로 썰어 갖은 야채와 된장육수에 말아먹는 대표적인 여름음식이다. 서귀포 앞바다에서 잡히는 보목 자리는 크기가 작고 뼈가 억세지 않아 주로 횟감으로 먹고, 서쪽의 모슬포 자리는 크고 뼈가 억세서 구이용으로 쓰인다. 하지만, 올여름에는 잡히는 자리 양이 적어서 물회용 횟감 구하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바다 수온이 매년 올라가다 보니 기존의 어장에서 잡히는 어종들의 양도 줄고, 소비도 예전 같지 않아서 어민들과 상인들 모두 휴가철인 여름이 더 이상 성수기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서귀포 주민들의 자리 사랑은 돼지고기 못지않다.

그 작은 물고기가 무슨 맛이 있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뼈채로 썰어 육수에 담그면 시간이 지날수록 생선 기름이 배어 나와 물회 국물은 고소하고 단맛이 난다. 자리의 육질 또한 단단한 편이어서 시간이 좀 지나도 냉장고에만 보관하면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자리 물회 맛집이야 수없이 많겠지만, 내 개인적인 추천은 보목항 인근의 백반집에서 파는 자림물회를 권하고 싶다. 특별한 팁은 없어도 도민들이 집에서 만들어 먹는 자리물회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도민들 여름 음식의 또 다른 쌍벽은 콩국수다. 옛날부터 제주도는 고추농사보다는 콩농사를 주로 지었다고 한다. 고춧가루가 귀한 섬에서 콩으로 담근 된장이 주 양념으로 쓰인 것이 지금까지 내려와 제주엔 된장 베이스의 음식이 주를 이룬다.

제주의 콩은 맛있다. 그래서일까, 제주산 콩나물로 국이나 나물을 무치면 그 또한 일품이다. 하물며 그런 콩으로 콩물을 내리면 얼마나 맛이 좋겠는가.

육지에서도 여름이면 콩국수를 많이들 먹지만, 전문점이 아닌 이상 직접 불린 콩을 갈아서 내어주는 집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서귀포에 여름이 오면 직접 갈아서 만든 콩국수를 거의 모든 식당에서 맛볼 수 있다. 백반집, 고깃집, 중국집 등 종류에 관계없이 모든 식당들의 냉장고 안에는 불린 콩이 구비되어 있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서귀포 사람들은 여름이면 콩국수를 많이들 먹는다.

실제로 서귀포에서 태어나 자라온 삼춘들 중에는 소고기를 못 드시는 분들이 많이들 계신다. 어려서부터 육고기 먹기가 힘들었고 더욱이 소고기는 먹어본 일이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이해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족한 단백질을 생선과 콩으로 대체했을 것이고, 이 또한 서귀포 삼춘들의 장수비결일 것이다.

자리물회와 마찬가지로 콩국수 맛집 역시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보기에는 허술하지만 도민들이 자주 찾는 식당이 보인다면 그곳에서 콩국수를 먹어보자. 육지에서 콩국수 맛집이라 불리는 식당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에어컨도 없이 긴 여름을 견뎌냈던 제주 삼춘들의 지혜가 이 두 음식에 담겨있다. 자리물회와 콩국수 두 특별한 음식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제주인들의 여름을 지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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