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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음식일기 03화

오아시스 - 응답하라 20세기

by 고작가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외부와 공간이 단절되는 인테리어는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가끔은 문 하나의 경계만으로 시. 공간이 함께 분리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들이 있다. 오늘 소개할 집 “오아시스”가 그러한 곳이다. 레트로, 아날로그 감성이 묻어나는 7080 주점이나 옛날식 포장마차와 같은 뻔한 추억팔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느낀 오아시스의 분위기와 맛은 잠시나마 나를 청춘의 그때로 되돌려 주었다.


나의 인생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청춘들이 나이프와 포크를 서툴게 쥐고 처음 보는 고기 덩어리를 썰던 그 시절의 경양식집. 바닥엔 조금은 촌스러운 카펫이 깔려있고, 어두운 조명아래 보기에도 투박한 페브릭 소파와 사각 테이블 사이로 흐르던 90년대 발라드 음악. 요즈음은 정말 보기 드문 중정이 있고, 중정 안의 작은 연목과 분수까지 어느 하나 90년대의 분위기가 아닌 것이 없는 곳. 오아시스.

메뉴는 돈가스, 함박스테이크, 오므라이스 같은 90년대 경양식집 메뉴에 스파게티까지 맛볼 수 있다. 굳이 맛의 평점을 메겨 본다면 추억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조금은 느끼하고 어쩌면 급식화 된 맛이라 느낄 수 있으나, 오아시스의 분위기와 감성이 더해지면 이곳의 음식은 맛 자체만으로 평가하는 것이 무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을 처음 알게 해 준 지인은 아일랜드에서 온 외국인 친구였다. 나와 같은 50대에 접어든 G형의 고향에는 이런 분위기의 레스토랑이 없다고 했지만, G형 역시 처음 왔을 때부터 편안하고 좋았다며 사장님과도 막역하게 지내는 단골이 되었다고 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G형에게도 아재감성이 통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이가 들수록 추억을 찾게 되는 건 비슷한 것 같아 같은 연배의 동질감도 들었다.

이제 60대에 들어섰다는 사장님 또한 예사롭지 않다. 종이 테이블 보에 사장님의 인생철학이 느껴지는 “골프와 아내의 공통점”의 문구들은 화려하게만 살고 싶지만, 현실과 타협하며 멋지게 살아가는 그의 노력이 담겨있는 듯하다.

쇄골이 멋진 사장님의 패션은 여성 손님들에게는 로망으로 남성 손님들에게는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언제 보아도 정갈한 그의 모습은 오아시스의 분위기를 더욱 끌어올리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이곳의 주 고객층들은 40~50대의 아줌마, 아저씨들이 대부분이다. 낮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점심식사를 하러 나온 가족들도 있지만 저녁시간에는 추억의 돈가스 안주에 시원한 생맥주를 즐기는 중장년층들로 늦은 시간까지 만석일 때가 대부분이다. 나 또한 신시가지 쪽에서 저녁약속이 있으면 2차로 맥주 마시러 가자고 일행들을 부추겨 한번씩 들르곤 한다.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일행들은 마법에 걸린 듯 그때 그 시절 풋풋했던 자신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설레었던 그 시절 그녀와의 첫 데이트. 군대를 가기 전 마지막으로 시간을 보냈던 소중한 추억의 그곳으로 되돌아가게 해주는 오아시스는 그렇게 서귀포의 핫플이 되어간다.


예쁜 카페에서 먹기에도 아까운 예쁜 음식들을 사진에 담아 인스타에 올리는데 열광하는 요즘 MZ들에게는 촌스럽고 구리게 느껴질지 모르는 이곳이 그들의 엄마, 아빠들에게는 오랜만에 가슴을 떨리게 하는 공간이 될지도 모른다.

아날로그 손목시계를 차고 공중전화를 쓰면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삐삐를 차고 학창 시절을 지낸 우리들이다. 졸업을 하고 벽돌 같았던 디지털 핸드폰에 열광했고, 스마트 폰을 처음 접했을 때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바뀔지 가늠하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렀고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것에 대해 조금은 무뎌지게 느껴진다. 오히려 나만의 라이프 스타일 대로 사는 게 행복하다는 걸 조금씩 알게 되는 나이가 되어서일까, 조금은 천천히 내 방식대로 살아보고 싶다.

변해가는 것에 지치고, 청춘의 설렘이 그립다면 90년대를 함께 살았던 친구들과 가보자. 오아시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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