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먹거리가 다양하지 못했던 80년대까지만 해도 외식메뉴의 최고는 단연 짜장면이었다. 입 주위로 검고 기름진 짜장소스를 묻혀가며 조금씩 아껴먹었던 그 시절 짜장면의 맛이란 참으로 달콤했었다. 중국음식은 짜장면과 탕수육만 있다고 알았던 작은 꼬마가 점점 커가면서 짬뽕이라는 새로운 맛에 눈을 뜬 건 아마도 대학 새내기 시절 소주를 물처럼 마시던 그때였던 것 같다. 매일 아침 뒤집어진 속을 달래기 위해 해장거리를 찾아 동기들과 학교를 배회할 때면 언제나 우리들의 속을 풀어주던 짬뽕국물은 짜장의 달콤한 맛을 잊게 해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짬뽕과의 인연은 바다를 건너 이곳 제주에서도 계속 찾게 되는 것 같다. 지극히 개인적인 입맛이지만, 짜장면 맛집은 일부러 다니진 않지만, 주변에 짬뽕을 맛있게 하는 식당이 있다고 하면 한 번쯤 찾아가게 되는 건 매운 국물의 유혹이 그만큼 강해서이지 않을까 싶다. 자극적이게 맵고, 적당히 들어간MSG. 매운 짬뽕의 국물은 한국 사람들이라면 싫어하기 힘든 맛이다.
육지에서의 기본적인 짬뽕이라면 오징어, 조개, 새우 같은 기본적인 해산물이 들어간 시원한 국물이 담백하고 불향이 적당히 난다면 맛있다고 인정해 주는 정도였다. 물론 짬뽕의 제대로 된 맛을 보고 싶다면 배달이 아닌 홀에서 먹어야 한다는 건 짬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기본이다. 그렇게 짬뽕을 즐기던 나에게 서귀포는 조금은 다른 짬뽕의 맛을 알려 주었다. 제주 도민들이 다니는 중국집에는 특이하게 두 가지의 짬뽕 메뉴가 있다. “바당 짬뽕”과 “고기 짬뽕”. 바당은 바다를 일컫는 사투리로 육지에서 흔히 말하는 해물이 들어간 짬뽕을 뜻하고, 해물은 들어가지 않고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보통의 국물보다는 훨씬 더 걸쭉하고 진한 돼지고기 국물 맛을 볼 수 있는 것이 “고기 짬뽕”이다.
제주 도민들의 돼지고기 사랑은 유별나다. 순댓국과 뼈접국, 몸국, 고기국수 같은 국물요리부터 식당 어디에나 파는 두루치기와 돔베고기는 점심식사로 삼겹살과 목살을 파는 고깃집들은 저녁을 책임진다. 그렇게 도민들의 돼지고기 사랑은 짬뽕까지 이어졌고, 육지에서 맛보기 힘든 “고기 짬뽕”은 이곳에선 친숙한 메뉴가 되어 있었다.
물론 해물 짬뽕이라 이름을 붙이고, 꽃게나 문어를 통째로 한 마리씩 넣어주거나 전복이나 딱새우를 넣고, 짬뽕이라고 하기엔 비싼 가격을 책정해서 파는 식당들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비싼 짬뽕을 사 먹을 도민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내가 음식일기에서 소개하는 식당들은 관광객보다는 제주 도민들이 즐겨 찾는 현지인 식당임을 이해하시길 바란다.
육지 것인 나에게는 아직도 바당짬뽕이 입맛에 맞지만, 조금씩 현지인화 되어가는 나의 입맛에도 변화가 시작됐다. 제주살이 3년 차가 되면서 해물과 돼지고기가 함께 들어간 짬뽕이 나에게 인생 짬뽕이 되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일주일에 한 번씩은 찾게 되는 최애 짬뽕집은 다행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신효동에 위치한 “유달 식당”이 그곳이다. 점심시간 파는 메뉴는 짬뽕과 짜장, 군만두 세 가지뿐인 허름하고 작은 식당이다. 가는 순서대로 주방 입구에 전화번호 뒷자리와 메뉴를 적어 놓으면 자리가 나는 대로 주인이 불러주는 시스템이다. 나가는 메뉴의 90% 이상이 짬뽕이다. 간혹 곱빼기를 시키는 사람들도 있지만, 면을 상당히 잘 먹는 사람이 아니라면 다 먹기 힘들 만큼 양도 푸짐하다. 이곳 짬뽕은 해물과 돼지고기가 함께 들어간 국물의 조화가 좋고, 한꺼번에 많은 양을 볶는 것이 아닌 주문만큼 매번 채소와 고기, 해물을 볶아 불맛이 항상 살아있다. 배달 주문도 받지 않고, 그날 재료가 소진되면 시간에 관계없이 문을 닫기 때문에 이른 점심이나 늦은 아침 식사를 위해 가는 것을 권하고 싶은 곳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서귀포 도민들이 사랑하는 짬뽕 맛이 이곳 유달 식당의 짬뽕이라 생각된다. 많이 팔기보다는 정해진 양을 맛있게 파는 이런 곳이 오래도록 성업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 전직 식당업을 했던 사람으로서 작은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