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군단 생활이 나에게 일깨워 준 것
1998년 2월, 매서운 겨울바람이 뺨을 에던 어느 날이었다.
성남시 창곡동, 지금은 위례신도시로 불리지만 그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과 다름없던 곳에 자리 잡은 학군교에서 2주간의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고 학군단으로 복귀하던 길이었다.
군화를 신고 눈 덮인 훈련장을 뛰어다니며 새벽을 깨우던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차가운 바람은 매섭게 불었지만, 그 바람마저 우리에게는 성취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그토록 두려워하던 첫 훈련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 그리고 이제 학군단 후보생으로서의 새로운 삶이 열리리라는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다.
학군단에는 오래된 전통이 있었다.
기초 훈련을 마치고 복귀하는 후배들을 위해 방학 중임에도 불구하고 선배들이 일부러 등교하여 성대한 환영식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군단 건물 앞, 일렬로 늘어선 선배들은 각 잡힌 자세로 군가를 부르며 우리를 맞이했다.
얼어붙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지는 군가는 가슴을 뜨겁게 했다. 더플 백을 멘 채 그 장면을 마주한 나는, ‘내가 학군단을 선택한 것은 옳았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 벅찬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환영식과 복귀 신고를 마친 뒤, 우리는 훈육관의 지시에 따라 피복고에서 대기하게 되었다. 며칠 만에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동기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졌다.
그러나 그 순간, 쿵쿵 울려 퍼지는 발걸음 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곧이어 불이 꺼지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날아차는 소리와 함께 욕설이 터졌다.
“이 XXX들, 다 죽고 싶어?”
“관등성명 안 대? 이 삐리리들아!”
S3, 즉 작전참모와 S4, 군수참모 선배였다.
30여 분간 이어진 고함과 혼돈 속에서 우리는 그저 얼어붙은 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기들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사라지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졌다. 공포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날 우리는 몸으로 배웠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자 우리는 강의실로 끌려갔다. 잠시 후, 인사참모(S1) 선배가 지퍼 달린 수첩을 들고 들어왔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몇 월 며칠, 어디서, 누구 선배한테 결례한 놈 나와.”
결례가 무슨 의미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당연히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강의실 뒤편에서 책상이 나뒹구는 소리가 들리고, 선배들의 고성이 이어졌다. 정적과 폭압이 교차하는 긴장 속에서 한 동기가 조심스레 앞으로 걸어나갔다.
“왜 나갔어?” 나중에 우리가 묻자, 그는 담담히 대답했다.
“아무도 안 나가면 더 오래 끌 것 같아서. 그냥 빨리 끝내려고.”
그 순간 나는 그의 뒷모습에서 진정한 동기애를 배웠다.
자신이 억울한 희생양이 되더라도, 전체를 위해 앞장서는 용기. 그 희생이야말로 우리가 앞으로 함께 겪을 학군단 생활의 본질을 상징하는 듯했다.
결산의 시간이 끝날 무렵, S1 선배가 우리에게 눈을 감으라고 지시했다.
고요 속에서 흐느낌이 번졌다. 긴장과 두려움, 그리고 알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 터져 나온 것이었다. 눈을 떴을 때, 책상 위에는 맥주 한 캔이 놓여 있었다.
“원샷.”
술을 못 마시는 동기들조차 그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선배들의 환영식은 끝이 났다.
며칠 뒤, 우리는 정식으로 후보생이 되었다. 입단식에서 선서를 하던 순간, 나는 가슴 깊이 다짐했다. ‘이 길을 택한 이상 끝까지 버텨내겠다.’
3월, 학군단 생활은 그야말로 군기 그 자체였다.
칼줄이 선 제복, 광이 번쩍이는 구두, 흐트러짐 없는 스포츠 머리, 검은 베레모까지.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지만, 동시에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백 미터 앞에서 선배로 보이는 인물이 나타나기만 해도,
“충~성!”
캠퍼스에 울려 퍼지는 경례 소리는 우리 자신감의 증표였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우리는 그 시선마저 즐겼다.
매일 아침 8시 30분, 자치위원실에 모여 복장 점검을 받는 것은 일상이었다.
구두 광이 조금이라도 깨지거나 셔츠에 주름이 잡히면 ‘진실의 방’으로 직행해야 했다. 팔굽혀펴기, 발바꿔뛰기, 앉아 뛰며 돌기… 선배들은 우리의 근육이 부족한 부위를 너무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체력 단련과 정신 교육은 육체적으로는 한계에 가까웠지만, 이상하게도 잡생각이 사라졌다. 오직 ‘더 잘해야 한다’는 마음만이 남았다.
그 시절의 나는 날마다 조금씩 단단해졌다.
힘겨운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법을 배웠고, 함께 땀 흘린 동기들과의 유대는 그 어떤 우정보다 깊어졌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것은 단순한 위안의 말이 아니었다. 내가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성장의 기회를 찾아내는 태도였다. 학군단 시절의 그 다짐은 훗날 사회에 나와 수많은 시련과 마주했을 때도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 겨울날의 얼어붙은 공기와 귀를 때리던 선배들의 호통, 동기의 희생, 그리고 땀에 젖어 울리던 경례 소리까지. 그 모든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든 벽돌이 되었다.
만약 그때 내가 피하려 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은 종종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던져준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나는 학군단에서 배운 단 한 문장을 되뇌곤 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