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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패모 Apr 09. 2023

하얀패모 이야기 10-게릴라 공습

게릴라공습

 <게릴라공습>

녀석과의 전쟁에 항상 긴장하면서도 시간은 흘러 흘러 드디어 입시 며칠 전이 되었다. 그때는 여학생은 가정 과목만, 남학생은 기술 공업 과목만 배우는 지라 합반인 우리 학교 같은 경우 여학생끼리 남학생끼리 옆 반과 합반을 했다. 그 날은 가사 과목 총정리 시간이 되어 우리 반 여학생들이 옆 반으로 이동해서 수업을 해서 나도 교실을 비우고 옆 반에서 수업을 받고 돌아 왔다. 그런데 분명히 비어 있던 내 서랍 속에 무엇인가 있었다. 꺼내어 보니 기다란 막대기 같은 것이 하늘색 포장지로 싸여 있었다. 즉 "선물"이라는 거였다. 포장 솜씨가 그리 매끈하지 않은 것이 남학생 솜씨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내게 선물을 줄 남학생은 없었기에 관심이 가진 않았지만 호기심은 갔다. 

‘분명 남학생 짓일 게다. 근대 누굴까……감히 나에게 이런 것을 보낼 대담한 인물은 없는데……’ 

그러다가 생각이 닿은 것이 어떤 멍청이가 내 책상을 다른 여학생 것으로 착각하고 넣어 놓았다는 것이다. 마침 우리 반에는 학기 초부터 소문난 삼각관계가 있었으니 내 육감은 당장 그리로 향했다. 

‘이걸 칠판에 놓고 주인 찾아 가라고 써서 아주 망신을 줄까? 분명 그 삼각관계의 주인공 두 놈 중 한 놈이렷다? 어떤 띨띨이가 지가 좋아하는 애 책상도 못 알아봐 ㅋㅋㅋ……’

나는 공개적으로 그 띨띨이를 망신을 줄 상상을 하며 행복해 했다. 그런데 나의 신중한 친구들이 강한 호기심을 드러내며 나를 만류했다. 일단 내 책상에 들어 온 거니까 내가 풀어 볼 권리가 있다는 거였다. 망신은 그 후에 주어도 상관이 없다는 거였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집에 와서 누군가 엄청 창피 해질 즐거운 상상을 하며 친구와 조심스레 풀어 보았다. 한 겹 한 겹……어? 마지막 종이를 다 풀어도 선물의 주인공은 나타나질 않았다. 내용물은 엿가락. 입시철이니 시험 잘 보라는 뜻인 건 알겠는데 대체 누가 누구에게 주는 걸까? 우리는 온갖 추측을 해댔다. 심지어 반장이 내게 주는 ‘욕’ 일지도 모른다고 누군가 말했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구쳤지만 이내 녀석이 야비할지언정 욕을 하는 걸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일축 되었다. 내 친구들과 나는 김이 빠졌다. 마침 저녁을 하시던 엄마가 들어 오셔서 엿을 보시고는 물어보셨다. 

“얘, 웬 엿이냐? 나 뭐 좀 조리는데 써도 되냐?”

어쩌겠는가? 우리의 사악한 마음을 즐거워하시지 않는 분의 뜻이리라. 

“응, 누가 내 책상에 넣었는데 누군지 모르겠어. 엄마 다 써요……”

기대가 컸던 만큼 싱거웠다. 그런데 잠시 후 엄마가 무슨 종이쪽지를 흔들며 들어오셨다. 

“얘, 이거 너네 반장이다. 네 오빠가 찾아 냈어. 응? 글씨는 영 못 썼는데 이거 그 얘가 쓴 거 맞지? 그 놈 착하기만 하구만 뭘, 너는 왜 맨날 나쁜 소리만 했어? 너는 그 애 엿 사줬어? 나중에 너도 뭐라도 하나 사줘.” 

“오빠가......뭘 찾아?”

믿을 수가 없던 나와 내 친구는 번갈아 그 쪽지를 직접 확인했다. 

“부반장, 부디 시험 잘 봐라, 반장” 

나와 친구들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아니 왜…….아, 나 진짜 미치겠네. 도대체 뭐라고 따지냐고 이건 대체!”

정말 이건 또 뭐란 말인가. 욕인가? 매일 학교에서 눈조차 마주치지 않다가 갑자기 선물을 줄 리가 만무했다. 나보다 충격이 덜한 친구들이 하나 둘씩 정신을 차리며 나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러게. 하필 이딴 걸 선물이라고. 의미가 이중적 이잖아. 이걸 노린 걸까? 따지면 선물이라고 할 거고 답례를 하자니 욕한 걸 고마워하는 거고. 정말 고단수다, 이 자식.” 

‘아! 이 지혜로운 친구 지혜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나의 진정 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지고!’

“걔 그렇게까지는 안 봤는데 왜 그러냐. 그렇게 못살게 굴고선 무슨 이제 와서 선물 이야?”

“끝내 너한테 지가 반장이라는 걸 각인시키자는 건가?”

‘오-. 그럴 수도. 친구야 너도 사랑해.’ 

“전화에 선물까지......예사롭지가 않아...정말 너한테 마음 있는거 아냐?”

‘아….이 4차원과 내가 왜 아직 절교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며 윽박지르는 대신 내가 물었다.

“그 자식 작년에는 지네 부반장하고 어떻게 지냈지?”

“착했다고 하던데......”

“착하긴 개뿔! 그럼 나하고 도대체 뭐가 꼬여서 이래? 저거 원래 저렇게 여자애들한테 어려운 줄 모르고 거리낌없이 막 대해?”

“신사란 말도 가끔 듣고 살았나 보던데......”

“이런! 신사가 다 죽었냐? 전화, 선물 이런 게 신사야? 그 놈이 여자애들 대하는 꼴을 봐라. 지 잘난 맛에 사는 놈이지 그게 무슨 신사? 그나저나 이제 난 어떻게 해? 나도 사줘야 돼?”

“그냥 있자니 꿀리고 사주자니 우습고 그렇다 그지?”

“내 말이!”

생각 같아선 그 엿가락으로 녀석을 마구 패주고 싶었지만 우선 사태를 해결해야 했다. 무수한 고민 끝에 나도 녀석에게 점잖게 성경 묵상집을 사서 던졌던가 어쩧던가 기억도 나질 않는다. 다만 그 후 그런 거침없는 녀석의 대담한 행보에 나는 극도로 예민해졌다.

‘이......건 중대 사태다. 이건 심각한 냉전 규칙 위반이다. 허를 찔러도 분수가 있지……도대체 목적이 뭘까? 내가 아주 분해서 제풀에 죽기를 바라나?’

예상대로 이튿날 녀석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적이 내게 주었다. 선.물.을. 그 망할 하늘색 포장지가 꿈에 나타나 얼굴을 덮어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나. 쁜. 자. 식. 건. 방. 진.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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