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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패모 Apr 10. 2023

하얀패모 이야기 11-휴전

<휴전>

여학생들의 성적 부진과 나 역시 녀석에게 쳐질 까봐 두려운 마음으로 녀석에 대한 미움을 가득 품은 채 치렀던 연합고사가 끝이 났다. 학교생활은 이제 널널했다. 체육 시간엔 매일 게임만 했고 수업 시간엔 영화만 보았다. 나는 가끔 쉬는 시간마다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아이들을 멀찍이서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왠지 큰 전투를 함께 치르고 난 기분...... 아이들은 일상으로 무난하게 접어들었지만 난 좀 후유증이 컸다. 체력장 때 모두가 함께 응원하여 좋은 결과를 내고 좋아라 울고 웃던 일이며 체육대회 응원으로 목이 쉬어 버린 일 등을 떠올리며 이제 서로 의지하게 되었는데 헤어지는 게 못내 슬펐다. 당시 서부 영화에 심취해 있던 나는 급우들이 나를 무서워하면서도 마음속 깊이에선 나의 진심을 이해해 줄 거라는 착각에 빠져 늘 고집스럽고 외골수 리더인 존 웨인과 그의 부하들의 감동적인 이별의 한 장면과 우리의 졸업식을 거의 동일시했다. 그러다가 혼자 베갯잇을 적시며 매일 잠들기 전 나름대로 내 삶을 쏟아부은 학교와 급우들 과의 작별을 상상하며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학생들도 물론 여전히 골칫덩이 긴 하지만 그래도 전교에서 가장 활발하고 일 년간 나를 많이 웃겼다는 공이 인정되어 그 녀석들마저 쓸쓸한 마음에 한 켠을 보탰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는데...... 이렇게 이들과 헤어질 수는 없는데......’

날마다 혼자 추억에 잠기다가 끝내 나는 이 모든 것을 남기고 자하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러기엔 학급 문집 발간이 제격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벌써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내 머릿속에서 기획되고 있었다. 

‘졸업 문집을 내야겠다. 머리말, 논설문, 앙케이트, 선생님들 프로필, 서간문... 아... 또 뭐가 좋을까...’

그런데 누구와 이 일을 한 단 말인가!

‘당연히 학급의 반을 차지하는 남학생들의 이야기도 실어야 하고 그러려면 반장이란 녀석과 의논을 해야겠지! 끙~’

여기서 항상 내 상상의 기쁨은 싸늘하게 얼어붙어 멈추곤 했다. 

‘아-. 나의 아름다운 중학 생활 모든 추억 중에서 너는 실로 옥에 티로다...’

하지만 녀석에 대한 미움도 나의 백성을 행한 애틋한 마음을 단념시키지는 못했는지라 나는 녀석에게 어찌어찌 회담을 걸어 시험 후 졸업 전까지 졸업 문집을 만들 것에 대해 녀석의 동의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전쟁은 잠시 휴전 체제로 바뀌었다. 짧은 시간 동안 한 권의 책을 펴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총무 서기 회계 등 다른 임원들도 모두 함께 했다. 아직은 철없는 아이들을 녀석과 내가 구슬리고 협박해서 글을 받아 오고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페이지는 거의 녀석과 내가 채워 나갔다. 녀석은 의외로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회담을 할 땐 그 쌀쌀함 마저 얼굴에서 거뒀다. 또한 녀석은 나이에 비해 뛰어난 글 솜씨와 오랜 시간 다져진 그림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주었다. 선생님들을 캐리커쳐 한 녀석의 솜씨는 정말 감탄스럽기까지 하여 나는 녀석이 잠깐씩 아주 고맙기까지 했다. 오랫동안 미술 공부를 했다던 녀석은 미술을 좋아했지만 미술학원 근처도 못 가 베끼기에만 능한 나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속이 꼬였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걸 누군가 할 수 있다니 다행한 일이었다. 

‘나의 책이 녀석의 재주로 빛을 더하도다.......’

일을 하면서 느꼈지만 확실히 녀석은 다른 남학생들이 없는 감각이란 게 있었고 그 감각은 자주 나와 잘 맞아떨어졌다. 두 가지 안건이나 디자인을 놓고 회의를 하면 녀석은 대부분 내 것에 손을 들어주었다. 함께 일을 하던 다른 임원들도 우리의 그런 화해 분위기를 반겼다. 

“야, 우리 반이 이제야 뭐가 좀 풀리네, 응?”

신이 난 총무가 도를 넘었다. 

“아, 화기애애하고 얼마나 좋냐? 아쉽다. 진작 이랬으면 우리도 꼴등......”

내가 즉시 눈을 부라리며 사태를 진압했다. 

“뭐야?”

“아니, 그게 아니고 부반장 나는......”

“야, 총무, 몰랐는데 네 꿈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죽는 거였나 봐?”

이런 살벌한 대화는 언제나 내 혀에 장전되어 있었다. 하지만 녀석과 내가 눈에 띄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쩐지 책을 엮는 동안 녀석은 내게 월권이니 민주화니 시비도 걸지 않았다. 녀석은 내가 기획한 부분에 글도 잘 썼고 그림은 더 잘 그려주었다. 글과 그림을 놓고 이야기할 때면 꽤 죽이 잘 맞아서 나는 가끔 녀석이 여자면 좋겠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녀석과 나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끔찍이 좋아했고 ‘애수’의 그 멋진 신사를 동경했고 마네의 ‘그리스도상’을 흠모했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고스란히 펼쳐진 세계 지도에도 남다른 애정이 있었다. 녀석이 고흐의 광팬인 내게 고흐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광기가 있다고 놀려 대긴 했지만. 지구 어디에 그런 것들은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아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것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질색을 하는 나의 적이. 녀석에 대해 알아갈수록 내 반감은 조금씩 허물어져 갔지만 내 꼿꼿한 이성은 녀석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녀석은 뭐든지 나보다 한 술 더 떴다. 나는 디자인을 잘했지만 녀석은 그냥 미술 자체를 잘했다. 나는 영화 음악들을 좋아했지만 녀석은 세미클래식부터 클래식까지 곡 해석을 했다. 그런 점들은 내가 녀석에게서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이런 날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내 감각을 여러 친구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칭찬해 주고 밤을 새워 책을 만드는 내 열정에 자주 ‘존경한다’는 낯선 표현을 써 댔다. 그럴 때마다 당황스러워 여전히 그 여유 만만한 얼굴을 한 대 갈겨 주고 싶었다. 도대체 녀석 속에 들어 있는 구렁이는 몇 십 마리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받은 놈은 말을 못 한다고 예전 같으면 곧장 닥치라고 쏴 붙여 주겠지만 그냥 못 들은 체하며 오직 문집을 만드는 데에만 힘을 다했다. 그리하여 근 한 달이 못 되어 인쇄소에 손때 묻은 우리의 원고를 넘기게 되었다. 마스터라는 인쇄 방식으로 했는데 우리는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여 멀쩡한 마스터 지를 놔두고 도화지를 A4 사이즈로 일일이 잘라 접어 원고를 만들었다. 겨울 방학 내내 만든 학급 문집을 인쇄소에 넘길 때 녀석은 반장의 권한으로 한 턱 냈다. 

‘내 책 내는데 지가 왠 한 턱? 하여튼 저 재수......’

주로 작업을 우리 집에서 하다가 그때 그 아이 집에 처음 갔었나 싶다. 꼬꼬마 때부터 함께 자라온 몇몇 동네 조무래기들 말고는 남학생이라는 아이의 집에 처음 가 본 것이라 생각된다. 녀석이 여유 있는 집의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온갖 물건으로 들어차 좁아진 녀석의 방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책장에 빼곡히 들어 찬 책들은 내게는 너무나 낯 선 제목들이었다.

‘세계사 편력, 중동사, 히틀러의 나의 철학, 무대륙……뭐야, 이 놈은? 이런 책을 다 잃었 단 말이야?’ 

나라면 손도 대지 않았을 책들이었다. 한쪽 구석에 천체 망원경이 있는가 하면 제법 세월의 녹이 멋들어지게 묻은 이젤과 유화 도구들, 한편에 겹겹이 세워져 있는 녀석의 그림들 그리고 클래식 음악 자료들과 커다란 수동 카메라……참 관심도 다양했다. 그 방의 물건들은 내게 그 주인이 괴물이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내가 상상으로 하고 싶었던 것들은 그 애는 정말 다 하며 누리고 있었다. 

‘어-, 상종 못할 녀석이구나. 괴짜야 괴짜, 그러니 내가 그 고생을 했지. 애늙은이 같으니라고!’ 

반갑게도 녀석은 백과사전과 위인 전집은 나와 같은 것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나는 틈틈이 그것들을 즐겨 읽는 반면 녀석은 그걸 흥미 있는 부분들은 대부분 정확하게 외우고 있다는 것. 젠장. 나는 세계 지도와 국기들을 흥미롭게 보고 중요한 것들을 알아볼 수 있는 반면 녀석은 세계지도를 아주 정확히 그릴 수 있고 전 세계 국기들을 색까지 안 틀리고 그릴 수 있다는 것(녀석은 심심하면 쉬는 시간에 24색 볼펜으로 각국 국기를 그리고 색칠했다) 빌어먹을. 나는 녀석과 곧 헤어진다는 사실이 홀가분했다. 그러면 이 상대적인 열등의식에서 어쨌든 해방될 터였다. 책이 인쇄 만을 남겨놓고 있었고 우리의 휴전의 명분도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자, 이제 인쇄라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 남아 있었다. 제대로 된 종이도 아닌, 도화지를 잘라 한 장 한 장 글과 삽화들을 넣어 엮은 그 원고를 소중히 끌어안고 마스터 인쇄소들을 찾아다녔는데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날은 추웠고 대체로 우리가 가진 돈에 비해 너무 비싸게 인쇄비를 불렀다. 초초해진 나는 거의 마지막 인쇄소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무조건 싸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런데 어쩐지 녀석은 뒤에서 아무 소리도 않고 있었다. 좀 이상했지만 나는 혼자 계속 사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녀석이 갑자기 인쇄소 아저씨에게서 원고를 걷어 가지고 그냥 나가버리는 게 아닌가! 황당한 나는 쫓아 나가 따져 물었다. 녀석의 얼굴은 잔뜩 굳어 차디찼다. 

“뭐 하는 거야?”

“그냥. 여기 별로 안 내킨다. 다른데 알아보자.”

“뭐? 이젠 남은 곳도 없어. 여기가 마지막이라고. 잘 사정하면 싸게 해 줄 것 같잖아? 아니. 어차피 내가 흥정하고 있었는데 가만히나 있지 이러면 어떻게 해?”

“미안한데 그러기 싫었어.”

“뭐? 그게 이유가 되냐? 갑자기 싫은 게 뭐야? 인쇄소가 맘에 안 든다고?”

“난 그런 종류의 인간이 제일 싫어서.”

“그런 종류 라니?”

“몰랐냐? 넌 둔한 거냐 아님 모르는 척하는 거냐?”

“그러니까 뭘?”

“아까 그 사람이 너 보는 게 이상하지 않데?”

“뭐?”

난감했다.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지만 내가 워낙 둔한지라 그 순간은 흥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내 용건만 열심히 말하느라 기분이 나쁠 겨를이 없었다. 사람을 빤히 쳐다보며 빙글거리던 아저씨의 이상했던 눈초리가 떠오르자 갑자기 나도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그 아저씨의 태도보다 지금 녀석에게 그런 말을 듣고 있는 그 상황이 더 기분 나빴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누군가에게 그런 시선을 당한 것도 불쾌한 일이었지만 그걸 또 최대한 맞수가 보았고 그 맞수는 내가 그걸 알아채지 도 못했다고 핀잔을 주고 있는 꼴이었다. 배로 더 창피했다. 일단 나는 성격대로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쪽을 택해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한데 녀석은 계속 나를 나무랐다. 

“넌 굉장히 예민한 사람 같은데 또 어떤 때 보면 뭘 잘 모르는 것 같아.”

“흠... 그래. 내가 원래 무디다. 어쩔래. 하지만 난 그래도 그 아저씨가 싸게 해 주면 원고 맡긴다. 이런 얼굴을 잘 봐주시고 싸게 해 주시면 나야 감사하지. 근데 아저씨 취향이 참 별나시군. 으하하.”

그냥 한심 해하며 넘어갈 줄 알았던 녀석이 버럭 소릴 질렀다. 

“넌 왜 여자애가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하냐?”

홀가분하게 인쇄 맡기러 왔다가 일어날 거라고 예상했던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냐, 네놈이 결국 이렇게 말도 안 되게 휴전을 끝내는구나.’

나도 버럭 했다. 

“아, 그만해! 책 만들 거야, 말 거야!”

“지금 책 말고 네 얘기하잖아.”

“아 그래 나 무디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 도대체? 그런 눈초리 길게 받지 않게 해 준건 고맙지만 그래서 책은 어쩔 거냐고.”

“책은 어떻게든 나오게 할 수 있어. 지금 그깟 책이 문제냐?”

“어이구, 네가 그렇게 여학생들 체면 챙기는 놈인 줄 몰랐네? 그래서 여학생들 그동안 그렇게 깔아봤냐? 뭐 그깟 책? 네가 시작한 일 아니라 이거냐? 관둬라. 어차피 내가 시작한 일. 내가 인쇄 끝낸다. 넌 책 나오면 고상하게 나눠 주기나 하던지!”

녀석은 나를 마치 성추행을 당하고도 그 사실을 인지조차 못 하는 사람을 보듯이 딱하게 보며 잔소리를 더 하려 하길래 나는 그냥 쌩허니 집으로 왔다. 책은 종이 회사에 근무하던 외사촌 언니 덕에 아주 싸고 근사하게 잘 나왔다. ‘자유인’ 이란 이름으로 인쇄된 그 책은 발행인에 녀석을 이름을 넣긴 했어도 거의 내 손을 거치지 않은 장이 없는, 나와 우리 반 악동들의 일 년을 고스란히 담은 책이었다. 졸업식 날 교무실과 학급에 그 책을 전달할 때쯤 녀석과 나는 그 책에 대한 무한한 감격으로 그날의 다툼도 잊고 사방에서 쏟아지는 격려와 감사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런데 녀석은 이 짧은 전장의 화해의 분위기를 분명 착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갑자기 마치 지와 내가 오랜 친구나 되듯이 선생님께서 부르시자 발걸음을 옮기며 많은 아이들 앞에서 지 재킷을 벗어 내게 사뭇 자연스럽게 건네며 

“야, 잠깐 이것 좀 받아 줄래?”

하며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얼떨결에 녀석의 웃옷을 받아 든 나는 주위의 수상한 눈초리를 다 받아내며 한 동안 그렇게 어정쩡 히 서 있어야 했다. 우리에게 옷은 그냥 옷이 아니라 그 사람이었기에 여학생과 남학생이 옷을 함께 놓거나 함부로 손에 닿지 않도록 조심했었다. 그 난감했던 순간, 재킷을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손에다 걸어 팔을 뻗어 내 몸에서 최대한 멀리 그 물건을 관리해야 했던 내 모습이 지금도 참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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