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모술수
<권모술수>
전쟁과 정치판에는 승리를 위해 상대를 속이는 권모술수가 난립하기 십상이다. 상대를 속이는 기술은 어떤 것은 기발 하여 ‘지략’ 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그 방법이 치사하면 권모술수가 된다. 나는 지략이건 권모술수 건 속임수엔 영 재주가 없었다. 성격상 정면 승부가 아니면 싫었다. 아마도 내가 야구를 했다면 죽어라 직구만 던지지 않았을까 한다. 녀석과 지리한 전쟁을 이어오면서도 내가 한 구석 녀석을 믿는 것이 있었다. 아니, 녀석이 아니라 녀석과 내가 공유한 근본, 즉 성서적 가치관을 믿었다. 그랬기에 녀석과 나의 전쟁에서 단 한 가지, 사실을 왜곡하는 따위의 치사한 권모술수는 걱정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얼굴색을 감추는 요령이 없는 나로서는 그런 전쟁은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녀석과 나는 진실을 근본으로 하는 믿음이란 걸 가지고 있었으니 나는 그 점에서 우리가 적수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즈음 나는 집에 돌아오면 매일 반장만 없으면 학교 갈 맛이 나겠다고 엄마한테 죽는 소리를 한 차례씩 했다. 엄마는 전에 없이 남학생 하나 때문에 괴로워하는 딸이 안쓰러우시어 늘 ‘자모 회의에 가면 녀석 어머니께 잘 말씀 드리겠다,’ 시며 잔뜩 긁힌 내 마음을 다독여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엄마가 모처럼 자모회에 다녀오신다고 했다. 나는 이 어머니들의 회담에 작은 기대를 걸었다. 강대국에 기대는 건 치사 하지만 뭐 남북관계도 아니고...
‘제발 서로 말도 안하고 부딪히지도 않고 녀석의 잘난 체 하는 꼴 좀 안보고 지낼 수 있게 되기를...’
하지만 나의 이런 기대는 회담 후 적에게 호의를 가지고 오신 어머니로 인해 봉오리 째 무서리를 맞은 꽃처럼 피지도 못하고 져 버렸다. 어머니는 그날 일부러 녀석의 어머니를 만나 좀 따지시려고 얘기를 꺼내셨단다. 그런데 녀석의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를 만나자 마자 반색을 하시며 “꼭 뵙고 싶었다고.” 하셨단다. 이유인즉슨 아들이 생전 그런 일이 없더니 3학년이 되고 서는 집에서 여학생을 자주 칭찬 한다는 거였다. 집에 오면 부반장이란 아이에 대해 이야기 하며 이것저것 칭찬을 해서 어떤 학생인지 무척 궁금하다고 하셨다나. 어머니는 내 말만 듣고 따졌다가 괜히 망신만 당할 뻔 하셨다며 오히려 나를 나무라셨다. 그 회담 결과는 한 마디로 절망이었다. 제.기.럴. 그건 생각지도 못했는데......적어도 녀석과 진짜 정치 흉내를 내며 싸울 걱정은 하지 않았었는데......차라리 총을 난사하며 하는 전쟁이 깔끔했건만......하지만 이제 희망은 없었다. 녀석은 내겐 전혀 있지 못한 정치인으로서의 덕목이 있다는 거였다. 즉 녀석은 교활하기까지 한 거였다. 그 싸늘한 얼굴 어디를 봐서 내게 호의적인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께 들은 그 말을 나는 단 한 마디도 곧이들을 수 없었다.
‘이중적인 인간이다. 게다가 치밀하고. 자모회에서 엄마들이 만날 수도 있다는 것까지 계산까지 한 게 틀림없어. 망할 자식. 거기까지 생각하다니. 뼈 속까지 정치적인 인간. 난 그렇지 못한데. 난 그저 신념을 지키는 전사일 뿐인데. 이런 녀석과 전쟁이라니......’
그 날, 그렇게 녀석과 나의 차이를 확인한 날, 아니, 그렇게 내가 해석한 날, 참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