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송신
<적의 송신>
학교에서 집이 가까웠던 나는 일단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으로 향했다. 우리가 모여서 하는 일은 그 날의 리뷰였다. 1교시부터 마지막 교시까지 선생님이며 아이들 모두가 우리의 리뷰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수다를 떨면 재미있었던 일은 더 재미있어지고 화가 나는 일은 더 화가 나곤 했다. 그 방화 후 수다는 우리 삶의 오감을 배가시키고 삶을 아주 진하게 느끼게 해주는 중요한 일과였다. 그렇게 수다를 떨다가 숙제를 하고 다시 수다를 떨면 친구들을 집에까지 바래다 주는 것으로 그 거룩한 의식은 끝이 나는 거였다. 친구 집 앞에서 한 참을 더 수다를 떠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고 나면 한 아홉 시는 되어야 혼자가 되었다. 가을 소풍 때인 것 같다. 하루 전날 여전히 우리는 모두 그 거룩한 의식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녀석이 느닷없이 대형 사고를 쳤다. 감히 우리 집에 전화를 한 것이다. 모두 열과 성을 다하여 그 날을 훑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들어오셔서 말씀하셨다.
“얘, 전화 받아라.”
둘러보니 우리 중 빠진 사람은 없었다. 우린 서로 의아하여 쳐다보았다.
“전화할 사람이 없잖아?”
“그러게? 엄마 누구?”
“반장이라는 데?”
모두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 왜?”
엄마는 오히려 나를 재촉하셨다.
“아 반장 이래. 빨리 받고 물어보던지.”
친구들과 나는 이 대담한 전화에 당황했다. 수많은 추측들이 순간 우리 뇌리를 스쳤다.
“아니, 그 재수가 왜 전화를?”
“그러게, 감히.”
“웃긴다, 걔 정말. 건방져. 지가 뭔데.”
“학교에서 말하지 왜 전화야?”
아름다운 공감들이 순식간에 쌓였다. 그런데 꼭 이럴 때 4차원들이 있다.
“반장이 못되게 굴더니 사실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절교하고 싶냐?”
“미안. 내가 너무 심했지? 그나저나 그 재수가 왜 전화까지 하고 난리지?”
친구들의 무수한 궁금증을 뒤로하고 나는 전화를 받았다. 그들은 짧은 순간이나마 진정으로 나와 함께 민망히 여겨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민망함을 그들의 호기심보다 강하지 못했고 그들에게 떠밀려 나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놈의 목소리를 들어내야 했다. 우리의 이 수선에 비해 녀석의 목소리는 얄밉게도 태연했다.
“부반장이냐?”
“오냐. 나다.”
“나다. 반장.”
“그래서?”
“내일 소풍 때문에. 졸업 사진 집합 장소 다 알렸냐?”
“아까 다 알리는 거 봤을 텐데?”
“반장으로서 확인하는 거다. 여자애들이 끼리끼리 다니니까 집합이 어려운 건 알지?”
“내가 알아서 해. 그걸 전화 씩이나 해야 하냐?”
“전화란 원래 멀리서 전할 게 있을 때 쓰라고 있는 게 아닌가?”
“됐고 다 전했으면 끊어라.”
“그럼 내일 보자.”
“딸깍!”
나는 대답대신 수화기를 힘차게 내려놓았다.
녀석의 용건은 그 뒤로도 종종 이어졌다. 숙제나 학교 행사 일정에 대한 재확인 같은 거였다.
“뭐래?”
“낼 여학생들 졸업사진 장소 아냔다.”
“웃겨. 지가 뭐라고. 남자애들이나 챙기면 됐지, 참 나 어이가 없다. 월권은 지가 한다.”
“그러게. 감히 나한테 전화 라니. 미운 짓은 골라 다 할 모양이다. 내가 저 한 테 뭘 그리 못했다고 이래 도대체?”
“그러니까......너 힘든 건 우리가 알지......”
요즘같이 휴대폰이 흔하고 문자를 할 수 있는 세상에선 이해하기 힘든 일이겠지만 당시는 휴대용 통신 장비라고는 ‘삐삐’ 라는 것으로 간신히 연락을 했을뿐더러 그마저 모든 학생들이 휴대하는 것도 아니었고 대학생들이나 쓰던 물건이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문제는 당시가 이성 간에는 전화 통화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이었던 시기라는 점이다. 게다가 요즘처럼 이성 친구가 많은 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었다. 더러 서로 부모님 끼리 친해서 허락해서 연락을 하는 남녀학생들이 있었지만 소수였고 그들조차 대개는 사적인 전화를 하지는 않았다. 만약 이성간에 사적인 전화를 하면 그들은 곧 날나리거나 ‘끼 있는’ 아이였다. 나는 그런 일 하나 없이 깨끗하게 무실점으로 학창생활을 아홉 해째 잘 관리해오고 있었다. 그런 나의 무오점 역사에 느닷없이 남학생이 전화를 하여 흠집을 냈으니 나의 분함이 어떠했겠는가! 깨끗한 흰 블라우스에 시뻘건 짬뽕 국물을 뒤집어써도 그 보단 나았을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다른 친구들과 모여서 숙제를 하다가 녀석이 전화를 해서 친구들도 모두 알게 되니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무슨 특별한 이야기가 오가서 가 아니라 전화가 온 그 자체가 문제였다. 이건 나를 하나도 어렵게 여기지 않는 무례함으로 해석되어야 마땅했다. 녀석의 그 멍청하고도 쓸모 없는 전화는 나의 명예에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녀석은 내가 방과 후 거의 혼자 있지 않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왜 하필 친구들과 잔뜩 모여 수다를 떨 그 시간 필요도 없는 전화질을 해서 사람을 난처하게 하는지 화가 났다. 시간이 갈수록 나의 진정한 벗들의 충심은 그들의 사악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고 묘한 관심으로 변하였기에 나는 더욱 녀석의 전화가 괘씸했다.
“아무래도 반장이 너한테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
한 눈치 없는 친구가 염장을 질렀다.
“야! 전화는 왜 목소리만 송수신되냐! 총알 같은 거 막 못 날리나? 놈은 총알이 아니라 아주 폭격을 해도 시원치가 않아!”
나는 애꿎은 전화를 탓하며 녀석이 나를 우습게 본 것에 대한 화풀이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