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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패모 Apr 09. 2023

하얀패모 이야기7-최전선-공동경비구역

최전선-공동경비구역

 <최전선-공동경비구역>

이렇게 서로를 원수보기같이 하면서 지내던 어느 날 컴퓨터 프로그램을 취미 삼아 하시던 담임선생님께서는 재미 삼아 한 가지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만드셨다. 매주 분단만 바꾸던 우리 학급의 자리를 아예 통째로 바꿔 주시겠다고 만드신 것이었다. 그런데 프로그램에 따라 무작위로 자리를 바꾸는 이 간단한 주말 행사는 우리를 매번 대단한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그 자리 바꾸기 프로그램이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와 짝이 되게 해주기를 기대했다. 특별한 오락거리가 없던 그 시절, 그저 기계적 확률일 뿐인데도 우리는 그것을 ‘기계조차 인정한 인연’ 으로 인식 했었던 것 같다. 어쩌다 something이 있는 아이들끼리 짝으로 배치되기라도 할라치면 여기저기서 킥킥대거나 대놓고 환호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고 싫어하는 아이들끼리 짝이 되어 터지는 한숨도 없지 않았다. 나도 그런 아이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매주 선생님께 종이를 받아서 자리 배치표를 칠판에 쓰는 일이 은근 흥분되었다. 이처럼 내가 그 프로그램을 두려움 없이 즐길 수 있었던 건 녀석과 내가 짝이 될 확률이 없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존경하옵는 담임선생님께서는 키 큰 학생들이 앞에 앉아 작은 학생들을 가리지 않도록 프로그램 하셨다며 귀띔해 주신 바가 있었다. 녀석은 키가 큰 편이라 뒤에서 돌 것이고 나는 앞에서 돌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짝으로 만날 끔찍한 일은 없었다. 수 없이 많은 배치표를 칠판에 베껴 썼지만 녀석은 늘 아주 멀리에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존경하옵는 스승님의 그 망할 프로그램이 졸업을 두어 달 앞두고 나를 앞쪽 맨 뒤로, 녀석을 뒤 쪽 맨 앞으로 보내는 배신을 저질렀다. 하여 녀석과 나는 짝은 아니었지만 같은 분단에 앞뒤로 앉게 되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적과 최전방에서 대치하다니...일주일을 이렇게 서로 경계해야 하는 4분단 4번째, 5번째줄. 여기가 바로 녀석과 나의 공동 경비 구역이었다. 적이 앞에 있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바로 뒤에 있는 건 더욱 불편한 일이었다. 감시를 할 수는 없고 언제고 받을 수 있는 아주 불리한 상황이었다. 나는 되도록 녀석을 의식조차 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녀석을 보지 않아도 녀석의 눈초리는 기회만 있으면 내게 ‘꼴찌들 대표, 한심한 여학생’ 이라고 쏘아 붙이는 것 같았다. 때론 녀석 따윈 아무것도 아니란 뜻으로 쉬는 시간이면 아예 자주 책상에 엎어져 잠을 잤다. 실컷 자고 있으면 가끔 녀석이 뒤에서 발로 내 의자를 툭툭 차서 단잠을 깨웠다. 신경질이 났지만 공동 경비구역에서 유혈사태를 일으킬 수 없는 만큼 나는 인내심을 발휘하여 천천히 일어났다. 허나 녀석을 마구 무시하는 뜻에서 자던 그대로 헝클어진 머리를 들어 최대한 흐리멍텅한 눈으로 녀석을 초점 없이 쳐다보았다. 녀석은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찡그림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풀고 있던 문제집의 문제에 동그라미를 쳐서 내게 보이며 턱짓으로 문제를 가리켰다. 대답을 해 보란 뜻이었다. 도대체 질문자의 자세 라고는 볼 수 없는 녀석의 무례한 태도를 보며 나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이 재수! 하나님, 정말 저게 정말 하나님의 작품이 맞습니까? 아니면 우리 둘 중에 하나는 마지막 행선지가 다른 게 분명합니다. 이런 재수와 어떻게 성경공부에서 함께 기도할 수 있는지요? 저놈도 형제를 미워함에 대해 갈등과 고민이 있기나 할까요??’

나는 귀찮다는 듯 일어나 알면 대강 대답해 주고 모르면 고개를 젓고 다시 책상에 엎어졌다. 나의 그런 인내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어쩌다 내 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면 한 손가락을 제 귓바퀴에 대며 얼굴을 찡그렸다. 크고 분명하게 말 하란 뜻이었다. 이런 녀석의 무례함 때문에 가끔 우리의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둔 자그마한 공동 경비 구역이 조용할 수만은 없었다.

먼저 내가 녀석에게 공포탄을 날렸다. 

“귀가 어떻게 됐냐? 어떻게 저 뒤까지 다 들리는데 너만 안 들린다고 그러냐?”

녀석은 흔들림 없이 응수했다. 

“어. 어떻게 됐어. 나 원래 한쪽 귀 잘 안 들려. 장애인이라 할 수 있지. 그런데 소위 크리스천이 장애인을 무시하면 쓰나.”

‘저걸 그냥! 제길! 그런 귀로 듣기 평가는 어떻게 나보다 잘 보냐......망할!’ 

녀석은 이렇게 속을 긁다가 어느 날은 하루 종일 굳거나 쌀쌀한 얼굴로 사람을 대했다. 그러다가는 또 어느 날은 멀쩡히 사운드 뮤직 방송 정보를 알아내어 가르쳐 준다거나 ‘어메이징 그레이스’ 같은 곡을 내게서 달래서 베껴가곤 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적과 무려 일주일간을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실로 대치만으로도 긴장감이 흐르던, 기운을 다 뺀 한 주였고 스승님의 그 무능한 프로그램을 몹시 혐오하게 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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